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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현장에 정의·평화 꽃피운 ‘우리의 동지’

등록 2013-05-13 19:51수정 2013-05-13 22:19

김용복 아시아태평양생명학 연구원 원장
김용복 아시아태평양생명학 연구원 원장
기고/ 오재식 회고록을 읽고
오재식 선생은 한국에서 태어나 민족 수난사에 대응하면서 아주 굵직하고 곧은 삶을 일구어낸 민족사의 위인이었으며 또한 교회일치(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남녘땅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나 북녘땅에서 일제의 억압 터널을 지나면서 잔뼈가 굵었으며, 민족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 젊음을 발휘하고 신앙을 연단하면서 민족과 민중의 현장 속에서 줄기차게 활동했다.

바로 그런 그의 삶이 <한겨레> ‘길을 찾아서’ 지면에서 살아있는 육성으로 들려왔다. 그의 이야기는 그와 동지들의 살아있는 시대적 대화처럼 다가왔다. 그는 떠나고 없으나 그가 남긴 구술 덕분에 그의 민중운동·민주화운동·통일평화운동의 골격이 조금이나마 드러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삶은 다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특유한 ‘소신적 내숭’이라고나 할까 그런 자세 때문이다. 그의 혼이 살아있기에 숨어있는 그의 육성은 언젠가는 또다시 우리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그의 삶을 관통한 운동 목표는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보편적 가치 실현에 있었다. 민족의 험난한 시련 속에서 단련된 신앙적 가치, 즉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었다. 그는 전환기 역사의 현장은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모태라는 원대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그처럼 원대한 비전을 가졌으며 출중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의 운동 목적과 목표의 투명성, 그리고 역사적 행동을 향한 격렬한 열정에 있다고 본다. 그는 불의를 절대 참지 못했다. 이것이 그를 민중의 역사·사회적 현장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힘이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민중현장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일제는 물론이고 분단과 전쟁, 개발독재시대가 그랬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왜 민중현장이 그를 그토록 ‘매혹’했을까? 그는 그곳이 정의의 꽃을 피워야 할 자리라고 확신했다. 바로 그 소신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 투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누구나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었다.

그는 정의를 위하여 민중의 역사적 원동력을 조직해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권력을 추구하지도 의존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그는 새 문명을 향해 나갔을 뿐 사사로운 명예나 성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금권과 재력이 정의를 가져다준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개발이라는 말이나 그 반대의 이데올로기도 아주 싫어했다. 그는 민중의 정의가 이루어지려면 새로운 문명질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민중이 스스로 삶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민중은 스스로 해방하여 스스로 정의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현장에서 그들의 발걸음을 듣고 함께 걷고자 했다.

일찍이 그의 민중운동은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에서 펼쳐져 아시아민중연대를 위한 ‘민중포럼’(피플스 포럼)으로 시작되었다. 그에게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필리핀 민주화운동, 인도의 민주화운동, 대만 민주화운동, 전세계의 민주화 인권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의 민중현장에서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는 민중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연대의 망을 이뤄냈다.

민족의 처절한 분단사 역시 그에게는 현장이었다. 그에게 역사적 정의란 민족의 자주적 통일과 평화였다. 그래서 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민족 분단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반드시 ‘민족 통일과 평화의 꽃’을 피우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에게 민족은 곧 민중이었다. 그래서 그는 1988년 ‘한국 교회 한반도 평화와 민족통일 선언’(88선언) 속에 ‘인도주의적 원칙’과 ‘민중참여의 원칙’을 명시했다. 90년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JPIC)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유치하는 데 앞장섰던 것도 그런 소신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그가 월드비전에서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의 물꼬를 튼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게는 북녘땅도 민중현장이었다.

그는 범세계적 수난과 질곡의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꽃이 만발하여 새 문명의 정원을 이룰 것이라는 확신으로 현장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모두들 그를 동지라고 여기고 있다.

69년 한국와이엠시에이(YMCA)전국연맹 대학생부 간사인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5년이나 어린 나를 ‘김형’이라 불러주었고 나 역시 한때는 ‘오형’이라 부를 정도로 격의없이 반세기 같은 길을 걸어온 동지였다.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인도하소서’라는 주제로 오는 10월 부산에서 열릴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주제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새삼 ‘오재식 동지’의 현존이 아쉽다.

김용복 아시아태평양생명학 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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