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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모든 것은 현장에서…“개미떼를 잊지말라” / 오재식

등록 2013-05-12 19:33

오재식(왼쪽)은 2012년 봄부터 시작한 <한겨레> ‘길을 찾아서’ 구술 인터뷰를 암 투병으로 중단하면서 곧 회복해 직접 마무리짓겠다고 다짐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떠났다. 하지만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반자인 부인(노옥신·오른쪽)을 통해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오재식(왼쪽)은 2012년 봄부터 시작한 <한겨레> ‘길을 찾아서’ 구술 인터뷰를 암 투병으로 중단하면서 곧 회복해 직접 마무리짓겠다고 다짐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떠났다. 하지만 동갑내기 친구이자 동반자인 부인(노옥신·오른쪽)을 통해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90
오재식은 2010년 6월 췌장암 수술을 한 뒤 정기적인 검사만 하면서 1년 남짓 푹 쉬었다. 여행도 다니고 집안 가득 쌓아둔 자료도 정리하며 평생 처음으로 아내 노옥신과 소소한 일상을 즐겼다. 그런데 2011년 10월 대장으로 전이된 암이 또 발견됐다. 이번에는 의사와 상의한 끝에 수술을 하지 않고 주사요법과 약물치료만 하기로 했다. 치료의 강도는 세서, 한번에 사흘 내내 주사를 맞고 나면 온몸의 힘이 빠지고 며칠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세번째 암의 공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모든 일을 내려놓고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보곤 했다. 그러자 문득 자신이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주어진 시간 속에서 그때그때 일을 처리하느라 쫓기듯 살아왔다. 맡겨진 일이라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했고, 그저 일이 잘 되도록 정신없이 달려들었던 일생이었다.

재식은 지금까지 일 속에서 시간이 자신과 공간을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간에서 벗어나고 보니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관계가 존재하는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일을 맡아 주어진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면 처음엔 당혹스럽지만 이내 살아가는 일에 대한 모험심으로 생기가 돌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가던 그 공간이 자신의 시간을 지배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길을 가다가 다리가 불편해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자.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치료를 할 수 있게 도와주면 그 사람과 나는 관계가 생기게 된다. 걷지 못하던 사람은 단순히 걸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 사람이 새롭게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 나 역시 그 모습에 감동받아 새롭게 인생을 살게 된다.”

재식은 대학 시절부터 반세기 넘도록 세계 구석구석 무수한 현장을 다니면서 그런 경험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해왔다. 그때마다 현장 그 자체가 그에게는 감동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만난 그곳이 현장이었고, 그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를 끊임없이 살아나게 했다.

현장 속에 있는 동안엔 자신이 스스로 시간을 지배하고 운동을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깊이 성찰해보니 그 관계로 생긴 공간이 스스로 운동을 해나간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인간관계에서 공간은 참으로 중요했다. 내가 시간을 들였으니 공간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었다.

그는 ‘공간의 교만’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세계사나 인간사에서 공간 형성은 주로 일방통행이었다. 힘 있는 쪽에서 없는 쪽으로, 문명에서 야만으로 흐르는 강한 쪽의 공간 확장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다는 역사는 어디까지나 그 땅을 정복한 세력의 주장이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훨씬 이전부터 대대손손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그들의 역사마저도 콜럼버스에게 발견당한 시점부터 기록되는 식이다.

재식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명이 만들어놓은 이 공간과 그 한계를 우리가 어떻게 재평가해야 하는가에 골몰했다. 강한 자, 가진 자라도 공간(관계)에 대해 교만을 부리지 말고, 공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 숱한 사람들이 공간을 만들어내고 시간을 지배해준 덕분에 ‘오재식’이란 한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들을 ‘개미떼’라 표현했다. 그처럼 이름 하나 남기지 않고 묵묵히 땀흘려준 개미떼들의 수고로 역사는 움직여왔다. 그는 2013년 1월3일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그 개미떼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친구 오재식 선생-이 친구는 1980년대의 암울한 시대를 우리와 함께 살면서 환란과 궁핍과 역경을 잘 참아냈고 온갖 격무에 잠 못 자는 과로로 눈이 터지면서도 잘 견디어냈습니다. 그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선지자 같으나 평신도 사제이고, 외교관 같은 언사에 무거운 진실이 있고, 죽은 자 같으나 씩씩하게 살아 있습니다. 슬픔을 당해도 기뻐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가난한데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권력과 명예는 없지만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고린도후서 6장 4~10절 각색)-1988년 5월2일 별 볼 일 없는 친구 일동’

그가 세계교회협의회 제네바본부로 떠날 때 서광선 교수를 비롯한 친구들이 환송 선물로 만들어준 목판에 새겨진 ‘인간 오재식’이다. <끝>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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