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한국월드비전 회장으로서 북한의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1998년부터 씨감자 재배기술 지원사업을 밀어붙여 북한 당국의 ‘감자혁명’을 이끌어냈다. 사진은 2002년 4월 북한 농업과학원 주최로 열린 평양감자원종 생산공장 조업식 때로 왼쪽부터 필자, 딘 허시 국제월드비전 총재. 한국월드비전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87
1997년 5월 한국월드비전 회장으로 첫 방북 때 5개의 국수공장을 더 짓기로 합의한 오재식은 계획대로 착착 일을 추진해 북한 각 도마다 1개씩 모두 6개를 완공했다. 국수공장들이 가동되기 시작하자 매달 공장마다 50톤씩 모두 300톤의 밀가루를 중국에서 구해서 보내주었다. 인근 지역 5만명에게 매일 한 끼의 국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즈음 양명희(양타이타이) 사장이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제공했다. 국수를 뽑아 건조실에서 상품으로 포장하게 되면 이 국수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 수 없으므로 국수가 나오자마자 현지 주민들에게 곧바로 배달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식은 곧 북한 담당자에게 국수공장마다 건조실을 없애고, 국수를 뽑자마자 주민들이 바로 받아서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재식도 평생 현장을 돌아다니며 축적한 경험의 지혜가 있었지만 대북지원 사업을 하면서 이처럼 새롭게 배울 점이 많았다.
재식은 이후 1년에 두세번씩 북한의 국수공장을 방문했다. 도마다 1개씩 지어 놓으니 덕분에 북한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남한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대북지원 단체들에 북한 당국은 제한된 지역만 공개했으나 월드비전만은 예외였던 셈이다.
국수공장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98년부터는 채소 생산 사업을 시작했다. 북한 아이들의 영양균형을 위한 비타민 공급원이 필요했는데, 토지가 비옥하지 못한 사정을 고려해 수경재배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농사법을 지원하기로 했다. 수경재배는 온실 속에서 커다란 판에 씨를 뿌린 뒤 그 밑으로 비료를 넣은 물을 흐르게 하여 재배하는 방식으로 어떤 지역에서나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박창빈 목사의 친구로 호주 동포인 김은각 기술사를 소개받아 첫번째로 평양 만경대 구역에 1000평 규모의 수경재배 온실을 만들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고, 99년 6월 만경대 온실에서 오이와 토마토를 처음 수확한 이후 매일 약 800㎏의 작물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그 이듬해에는 두루섬 지역에도 1500평 규모로 온실을 만들어 채소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 재식은 현지 탐방을 통해 온실에서 생산된 채소들이 인근 탁아소와 유치원, 병원 등의 단체급식용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경대 온실과 두루섬 온실의 성공으로 남북간 농업협력사업의 발판이 만들어졌다. 한국월드비전에서는 북한의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농업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하고 씨감자 사업을 제안했다. 2000년 3월 북한과 ‘씨감자 생산사업 실무합의서’를 체결하고, 두달 뒤 서울시립대 원예학과 이용범 교수를 북한농업연구소 소장으로 초청해, 농업진흥청 소속 농학자들과 함께 본격적인 씨감자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감자를 연간 400만톤씩만 생산해도 80만~100만톤의 식량이 부족한 북한의 식량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2001년 12월 베이징에서는 한국월드비전과 북한 농업과학원이 공동주최한 남북한 최초의 농업과학 심포지엄이 열렸다. 씨감자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남쪽에서는 이용범 교수를 중심으로 농학자와 농업기술자들이 참석했고, 북쪽에서도 같은 수의 기술자와 실무자들이 참석했다. 이후 씨감자 사업은 북한에서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가 되었다. 연간 400만톤 생산을 목표로 전국 5개 지역에서 수경재배로 씨감자를 생산해 보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 사업이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95년 대홍수 재난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국월드비전 이사회와 국제월드비전본부에서는 당장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는데, 씨감자 시설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부을 수는 없다며 반대 여론이 많았다. 재식은 한국 이사회뿐 아니라, 본부를 통해 대북지원 기금을 보내주는 일본·홍콩·대만 월드비전 사람들을 수차례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섰다. “개발은 긴급상황 때부터 계획하고 준비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지속가능한 생산시설을 제공해줘야 북한 사람 스스로 기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금 당장 북한 아이들이 굶는다 해서 먹을거리만 지원하다 보면 3년쯤이 지나 혹시 다른 나라에 재난이 발생하게 되면 기금을 돌려야 하지 않나? 그러니 지금 긴급구조와 더불어 개발사업도 함께 해야 한다.” 이런 설명이 잘 통하지 않아 얼굴을 붉히고 책상을 쾅 치며 언쟁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재식은 끝내 그들을 설득해냈다.
북한 당국은 ‘감자혁명’을 구호로 내세울 만큼 감자 생산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그때까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아온 북한에서 감자 중심으로 농업의 대방향전환을 하는 계기가 됐다. 10년쯤 지난 2007년 7월 북한은 양강도 대홍단 감자씨 사업장 준공식 때 월드비전을 비롯한 남쪽 참관단 150여명을 초대했다. 재식은 80㎞에 걸친 고랭지인 개마고원을 창밖으로 내다보며 감자 생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도착해 보니 이미 북쪽에서 만든 씨감자 생산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씨감자 사업을 처음 기획한 사람으로 소개받은 재식은 졸지에 칭찬을 많이 받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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