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1997년 1월1일 한국월드비전 회장을 맡은 뒤 전임 회장이 북한에 약속해놓은 국수공장 건설지원 사업을 서둘러 추진해 그해 5월 반세기 만에 평양을 방문했다. 사진은 98년 8월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방북한 탤런트 김혜자씨가 평안남도의 평성육아원을 방문해 국수공장에서 생산한 국수를 먹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모습. 사진 월드비전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86
오재식은 1997년 한국월드비전 회장을 맡아 가장 먼저 ‘국제월드비전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다. 월드비전이 1950년 한국전쟁 때 시작되었으니 2000년 50돌을 맞게 되는데, 국제본부에서는 한국을 50돌 대상국에서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휴전 뒤인 53년도에 등록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재식은 이 주장의 뒤에 숨어 있는 ‘주는 자의 논리’를 반박하며 항의했다. ‘전쟁 때 밥 피어스 목사가 모금해준 돈을 받아 한경직 목사가 과부나 고아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영락교회 신도들 중심으로 현장을 다니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봤는데, 왜 그것은 월드비전의 역사가 아닌가?’
결국 국제본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재식은 99년 무렵 연세대의 민경배 교수에게 <한국월드비전 50년사>를 써줄 것을 요청했다. 민 교수는 재식의 중학교 동창이자 김형석 교수의 애제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는 초기 자료가 거의 없어 민 교수는 미국 본부까지 건너가 직접 샅샅이 자료를 찾아와 ‘50년사’를 완성했다.
월드비전은 각국의 회장이 바뀌면 매년 2월 세계 회장단 회의를 본부에서 열었다. 재식도 취임 한달 남짓 만에 본부 회의에 참석했다. 재식은 이미 월드비전의 현황과 대북 지원 사업의 문제점을 숙지하고 있었다. 한국월드비전 회장이지만 국가보안법에 따라 정부 승인 없이는 북한과 교류할 수 없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니 국제본부에서 해결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본부에서는 재식을 무임소 회장으로 임명해주었다. 한국 국적의 국제본부 직원으로 인정받아 자유롭게 북한을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재식은 본격적인 북한 교류를 위해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의 박창빈 목사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담당을 맡겼다. 그동안 전임자인 이윤구 회장이 벌여놓은 북한 관련 사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북한 방문도 서둘러야 했다.
이 전 회장은 굉장히 추진력이 강해서 북한 교류만이 아니라 많은 성과를 이뤄놓았다. 그는 회장에 취임한 뒤 50년 이래 국제본부를 통해 받아온 원조를 받지 않고, 외국을 지원해주는 나라로 역사적인 전환을 시도했다. 한국도 이제 ‘돕는 나라가 되자’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벌여 ‘지원국 순위 10위’까지 올려놓기도 했다. 재식도 그 여세를 이어 지원국 7위로 올려놓았고, 그의 후임자인 박종삼 회장에 이르서는 3위까지 올라갔다.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원조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94년 11월 한우 60마리와 밀가루·병원침대 500개를 지원하는 것으로 북한 지원 사업을 처음 시작했고, 평안남도 평원에 국수공장 설립을 진행중이었다. 국수공장은 96년 12월 가동 예정이었는데 회장이 바뀌면서 연기된 상태였다. 그래서 재식은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그 약속부터 지켜야 했다.
마침내 97년 5월 재식은 한국전쟁 때 홀로 떠나왔던 북한을 거의 반세기 만에 다시 방문했다. 이 전 회장이 미리 섭외해놓은 양명희씨가 동행했다. 그는 재미동포인 선교사 남편을 따라 중국에서 왕성한 사업력을 발휘해 현지에서는 ‘여걸’이라는 뜻으로 ‘양타이타이’라고 불렸다. 북한에도 여러 번 다녀온 그는 현지 사정에 밝아 외교관계가 없는 북한과 일을 추진하는 어려움을 많이 해결해주었다.
평원의 국수공장을 찾아갔을 땐 한창 생산설비를 시험하고 있었다. 재식은 시설을 둘러본 뒤 북쪽 외무성 담당자와 만나 국수공장 5개를 더 지어주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북쪽에서는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곧 좋다는 승낙을 보내왔다. 식량난 해결이 절박한 북으로서는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국수공장 후보지 선정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재식은 최소한 도마다 한개씩 짓는다는 원칙에 따라 5곳을 지정해 제시했다. 평북 선천, 평남 안주, 평남 개천, 강원도 원산, 함북 신창이었다. 하지만 북쪽 담당자는 교통비 많이 들게 왜 이곳저곳에 세우냐며 평양에 5개를 모두 지어 국수를 생산한 뒤 나누겠다고 주장했다. 재식은 각 공장을 중심으로 그 지역이 발전하기를 바라고, 평양과 멀리 떨어진 지역 사람들도 쉽게 국수를 배급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맞섰다. 더구나 월드비전 이사회에서 이미 모든 결정이 난 까닭에 임의로 수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결국 북에서도 동의하면서 국수공장 설립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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