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왼쪽)은 1997년 1월1일 국제구호기구인 한국월드비전 회장으로 취임해 6년간 북한을 비롯한 지구촌의 빈곤 현장을 누볐다. 사진은 99년 5월 김선도(가운데) 월드비전 이사장과 함께 대한적십자사 정원식(오른쪽) 총재를 방문해 북한 비료지원 성금 1억원을 전달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85
오재식이 1994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을 만든 주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우려는 것이었다. 그 새로운 시대의 과제에는 여전히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통일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통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반전운동의 구호로서 평화가 아니라, 남북통일이 한반도 평화를 이루고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사회교육원에서 시행한 프로그램 가운데 ‘교실 속의 공존’ ‘평화적 교실 만들기’ 등은 교육계에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수많은 갈등과 모순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 바로 교실이었고, 그 교실에서부터 한국적 평화교육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삶의 자세를 바꾸어 나가고 민주적 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평화교육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풀무질이 되어 주었다.
사회교육원과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가 제자리를 잡을 즈음인 96년 9월. 중학교 은사인 김형석 선생으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왔다. 그는 점심을 사주면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내 얘기 듣고 ‘노’ 하면 안 돼. 무조건 ‘예스’ 해야 해”라며 얘기를 꺼냈다.
연세대에서 정년퇴임을 한 뒤 월드비전의 이사를 맡고 있던 김 선생은 이사장인 정진경 목사(성결교)와도 이미 논의가 끝났다며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95년 북한에 큰 홍수가 나 기근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당시 월드비전의 이윤구 회장(현 국제사랑재단 명예총재)이 직접 연락해 중국 선양에서 북한 사람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쌀 20만톤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해 합의서까지 쓰고 돌아왔다. 20만톤의 쌀을 마련하려면 수백억원의 기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회장은 모금을 위해 합의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하필 남북 쌀회담이 교착상태였던 까닭에 김영삼 정부에서는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정부 허락도 없이 북한 사람과 접촉한데다 20만톤은 정부 예산으로도 지원하기 버거운 대규모였던 것이다. 졸지에 ‘친북단체’로까지 몰리게 된 월드비전에서는 이사회를 열어 임기가 다한 이 회장의 후임을 서둘러 뽑아 사태를 수습하기로 했다. 바로 그 후임 회장 인선위원회에서 김 선생이 재식을 추천했고, 정 이사장도 전격 동의해 서로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재식은 또 한번 난감해졌다. 기독학생회 때부터 도움을 준 정 목사와 은사인 김 선생의 제안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필 월드비전이라니…. 사실 재식은 아시아교회협(CCA) 도농선교회 시절 국제 월드비전과 많이 싸운 이력이 있었다. 베트남전쟁 때 국제 월드비전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재식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 결국 강원용 목사에게 찾아갔다. 강 목사도 처음엔 탐탁지 않아 하며 한참 생각을 하더니 “역시 하나님이 자네를 부르시는 것 같다. 나는 노를 하고 싶지만, 생각 좀 하고 기도해 봐라”라고 했다. 한달쯤 뒤 다시 찾아간 재식에게 그는 “기도했어?”라고 물었다. “네, 많이 했는데, 아직 정하지 못했어요.” 그러자 그는 “무슨 기도를 그렇게 오래 해? 가, 가!”라고 결론을 내줬다.
물론 재식의 결심에 김 선생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 소문이 나라 밖으로까지 퍼졌는지 세계교회협의회 제네바 본부에서 같이 일했던 드웨인 엡스는 “그 양반이 달나라로 갔다면 믿겠는데, 어떻게 월드비전에 간 것을 믿으라고 하냐?”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97년 1월1일 재식은 한국월드비전 회장으로 공식 취임했다. 막상 월드비전에 들어가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시스템이 잘 되어 있고, 재정도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어 깜짝 놀랐다. 과연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다웠다. 월드비전이 생겨난 것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었다. 창시자 밥 피어스 목사가 한국전쟁 중에 거리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보고 전문구호기관을 만들고자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피어스 목사가 미국 포틀랜드에 사무실을 열어 교회를 중심으로 모금을 시도하고, 한경직 목사와 함께 한국의 전쟁고아와 남편 잃은 부인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월드비전은 첫발을 내디뎠다. 한 목사는 월드비전의 초대 이사장이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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