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환갑을 맞은 오재식은 아내와 약속한 대로 한국으로 돌아오고자 세계교회협의회 제네바 본부에 사직서를 냈다. 사진은 그의 추천으로 91년 2월 세계협의회의 호주 캔버라 총회에서 주제강의를 맡은 정현경 당시 이화여대 교수가 한복 차림으로 초혼제를 시연하는 모습으로, 지금까지 세계 신학계에 논쟁을 던져주고 있는 장면이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83
1990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질서의 보전 세계회의’(정의평화창조질서회의·JPIC)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기구개편에 관한 논의도 있었다. 그 결과 제네바 본부에서는 16개 국으로 나눠진 복잡한 기구를 4개 국으로 통폐합하기로 했다. 초기부터 있던 신앙·직제와 선교국은 그대로 두고, 국제위원회·개발국·소수민족·청년국·여성국 등을 모두 제3국으로 하며, 교회나 사회 봉사를 지원하는 사업은 제4국에서 맡기로 했다.
그런데 오재식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그 거대한 제3국장을 맡게 된 것이다. 개발국만 관장하다 갑자기 기존 13개 국에서 하던 일까지 다 챙겨야 했으니 그야말로 몸이 열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제3국은 아시아과·라틴아메리카과·아프리카과로 나누었는데, 그나마 한국의 박경서 박사가 아시아과 담당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제3국에서는 ‘정의평화창조질서’ 프로그램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다가 이를 신학적으로 정리해보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신앙·직제국에 맡기지 말고 제3국에서 직접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신학자회의도 열어야 했다. 재식은 애초 이 프로그램을 주관해온 프레만 나일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일만 벌여놓고는 영국의 선교단체 사무총장을 맡아서 훌쩍 떠나버렸다.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긴 했지만 신학을 깊이 전공하지 않은 재식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 신학자회의를 몇차례 거듭하면서 ‘생명’에 대한 신학적인 조명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생명신학’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래리 라스무센은 신학자회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신학적인 틀을 만들어주었다. 이때 참여했던 김용복 박사도 생명신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제3국의 주도로 개념이 정리된 생명신학은 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7차 총회를 거치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세계협의회는 그 뒤부터 생명신학을 활동의 주제로 내걸었고, 재식은 그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생명신학에서는 경제개발이나 국가발전을 넘어서는 창조질서의 재정립,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위상 재정립을 진정한 개발의 의미로 설정했다. 논의가 깊어지면서 생명의 관점에서 정의와 평화의 문제를 정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편 캔버라 총회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신학적 논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당시 주제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였다. 총회 준비 실무를 맡은 재식은 어느 날 서광선 이화여대 교수한테 전화를 걸어 제자이자 후배인 정현경(현경) 교수를 총회의 주제강사로 추천을 받았는데 어떻겠냐고 상의를 했다. 서울에서 한밤중에 전화를 받은 서 교수는 임용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정 교수에게 부담스럽지 않겠냐며 신중한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재식은 고심 끝에 정 교수를 주제강사로 정했다.
총회에서 주제발표할 자료를 준비해 온 정 교수에게 서 교수는 ‘이왕 맡았으니 좀더 획기적인 내용으로 다시 써볼 것’과 ‘온몸으로 보여주는 강의를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제3세계와 여성을 대표해 주제강연을 한 정 교수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91년 2월8일 총회 둘째 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무대에 서서 신을 벗더니 총회장의 모든 참석자들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한 뒤 종이를 태우는 등 그야말로 온몸으로 ‘초혼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총회장의 반응은 완전히 둘로 갈렸다. 다원주의에 관심을 둔 그룹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대단하다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한편에서는 ‘어디서 저런 무당 같은 사람을 데려왔느냐’고 날을 세웠다. 그를 계기로 정 교수는 세계 교회와 신학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생명신학 프로그램에 몰두하던 93년 3월 재식은 환갑을 맞았다. 아내 노옥신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고 상황을 물었고, 재식은 ‘약속은 꼭 지킨다’며 제네바 본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런데 에밀리오 카스트로 총무가 펄쩍 뛰었다. 기구까지 개편해서 ‘정의평화창조질서’ 프로그램을 맡겼는데 덜컥 그만두면 어쩌냐는 것이었다. 재식은 체력의 한계를 호소하며 ‘이제 한국에서 일하다 죽고 싶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만 함께 하자는 그에게 재식은 좋은 후임자를 선택해주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재식이 점찍어둔 후임은 세계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를 지낸 케냐 교회협의회 총무 새뮤얼 코비아였다. 에밀리오의 허락을 받은 재식은 개발국에서 함께 일하던 케냐 여성 활동가와 함께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나이로비로 향했다. 하지만 코비아도 “지금껏 제네바에서 줄곧 일하다 이제야 조국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떠날 수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하지만 ‘설득의 대가’ 재식은 끝내 그를 설복시켜 후임자로 앉혔다. 그렇게 다시 본부로 온 코비아는 콘라트 라이저 다음으로 세계협의회 총무까지 지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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