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기독교계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주선으로 86년 9월 스위스 제네바의 글리온에서 분단 뒤 처음으로 통일협의회를 열었다. 사진은 88년 11월 2차 글리온 회의에 참가한 남북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이효재·강문규·고기준(북쪽 대표), 세 사람 건너 김성수 주교. 맨 뒷줄 오른쪽부터 박상증·오재식, 그 앞이 김혜숙(통역관).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7
1984년 10월 도잔소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85년 2월 ‘한국교회 평화통일선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섰다. 도잔소 회의를 계기로 남과 북의 기독교인들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통로를 갖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도잔소 회의를 주최한 세계교회협의회(WCC)도 매우 고무되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관한 의제를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관심사로 설정했다.
세계협의회에서는 도잔소 회의 때 북한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으니 대신 자신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견을 북쪽에 타진했다. 앞서 74년 협의회에 가입한 북한에서 실제로 종교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자 북쪽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공식 초청하겠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이리하여 85년 세계협의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는 대표단을 꾸리고, 나이난 코시 국제위원회 국장과 활동가 에릭 와인가트너를 공식 대표로 선임했다.
평양에 다녀온 뒤 세계협의회에서는 북한 대표단을 제네바 본부로 초청했다. 북쪽에서도 선뜻 긍정적인 답을 보내왔다. 전례없는 북한 대표의 방문을 앞두고 세계협의회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곧 국제회의 준비에 돌입했다.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정보당국의 방해와 감시를 피하고자 제네바 외곽의 조그마한 마을인 글리온으로 장소를 정했다.
이렇게 해서 86년 9월2~5일 해방 이후 남북 기독자 대표단과 국외 인사들이 처음으로 직접 만나 한반도 통일을 논의하는 역사적인 자리가 마련됐다. 이른바 1차 글리온 회의(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자협의회)였다. 이 회의의 주제는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이었다.
그런데 도잔소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남쪽 대표단이 글리온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의 장벽을 또 한번 넘어야 했다. 이번에도 오재식은 직접 담판에 나섰다. 허문도 당시 통일부 장관을 세검정의 한 중국집에서 만난 재식은 남북 기독교 대표끼리만 만나면 문제가 되겠지만 국제회의니까 정부에서도 양해를 해달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어 글리온 회의에 참가할 한국 대표단 10명을 선정했는데 역사적인 회의인 만큼 신청자가 밀렸다. 결국 재식은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 교회협의회의 김소영 총무를 대표로 교단 관계자들과 김준영 목사, 강문규 대한와이엠시에이 사무총장 등이 참가하기로 했다. 북한 대표단은 모두 4명으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인 고기준 목사와 김운봉 목사, 김혜숙 통역관, 김남혁 지도원이었다.
마침내 글리온에서 처음 마주한 남북 대표들은 첫날엔 조금 서먹하게 지냈지만, 이튿날부터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날에는 남북 목사들이 서로 손을 잡고 공동으로 성찬 예식을 인도하는 역사적인 장면도 연출됐다.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들의 인도로 성찬을 받았다.
86년과 87년 사이 세계협의회는 두 차례 북한을 다녀왔고 미국과 일본 교회협의회 대표단도 방북해 남북 교회의 교류와 화해 분위기 조성에 힘을 보탰다. 글리온 회의는 같은 장소에서 88년 11월 2차, 90년 12월 3차까지 열렸고, 4차 회의는 95년 3월 일본 교토의 간사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열렸다. 이후에도 남북 교회는 몇차례 5차 회의를 열기로 합의는 했으나 2002년 무산된 뒤 중단된 상태다.
재식은 90년대 후반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 지원사업을 위해 평양을 자주 방문할 때마다 고기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서기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볼수록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우선 목사로서 서기장 같은 직책을 갖는 것을 상당히 거추장스러워했다. 한번은 평양 봉수교회에서 고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히틀러, 무솔리니, 쇼와 천황 같은 사람들을 모두 다 우상’이라고 얘기했다. 물론 김일성을 그 대열에 넣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독재자들처럼 독재를 한 김일성도 우상이란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었다. ‘교회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듣는 재식의 마음이 다 아슬아슬할 지경이었다.
언젠가 북한을 방문했던 남쪽의 한 예장 총회장이 들려준 일화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평양의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 혹여 고 목사가 ‘가짜 기독교인’이 아닌가 시험해 보고자 바로 옆에 앉아 삐딱한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살폈단다. 그런데 고 목사는 악보를 보지 않은 채 찬송가를 4절까지 정확하게 불렀을 뿐만 아니라 손때가 묻어 쭈글쭈글 낡은 성경에는 밑줄도 많이 그어져 있었다. 또 기도가 끝난 뒤 손수건으로 얼른 눈물을 닦기도 했다. 이후 총회장은 많은 사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다. 내가 고 목사를 시험했으니 내가 바로 사탄이다’고 고백했다. 북한에서 헤어질 때 서로 눈물을 보이면 북한 당국에 요주의 대상자로 지목될 가능성을 잘 알면서도 그는 고 목사와 악수하며 울기도 했단다.
그런가 하면 1차 회의 때부터 참석한 김혜숙 통역관은 몇년 뒤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훗날 재식이 북한을 방문해 만났을 때 그는 봉수교회 집사를 맡고 있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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