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1971년부터 10년간 일본에서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로 일하는 동안 일본 노동운동의 주도세력을 키워낸 간사이 그룹과 긴밀한 연대를 맺었다. 사진은 간사이 그룹의 핵심 멤버였던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의 마에지마 무네토시(뒷줄 오른쪽 둘째) 총간사와 스미야 미키오(뒷줄 오른쪽 셋째) 도쿄대 교수, ‘기독자 긴급회의’ 대표 나카지마 마사아키(앞줄 오른쪽 둘째) 목사 등 일본 기독교 대표단이 87년 5월 북한을 방문한 모습.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3
오재식이 1970년대 일본에서 맺은 인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다케나카 마사오 선생이다.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의 위원장으로서 재식을 간사로 발탁해간 인물이 바로 그였다.
교토 도시샤대 교수이기도 했던 다케나카는 간사이 세미나하우스를 열어 지역 노동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교토와 오사카를 비롯한 간사이 지역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 중심지로서 70년대에는 노동운동도 대단히 활발했다. 노조가 이른바 ‘춘투’를 벌이는 3월이면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나 도시의 전차나 버스가 모두 멈춰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이 지역 노동운동의 핵심 세력은 간사이노련이었는데, 다케나카는 이 조직을 만드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간사이노련에서는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각 사업장의 노조에 가입시키는 방법으로 조직을 키워갔다. 그때 간사이 세미나하우스에서 다케나카가 진행한 ‘노동자의 지도자 영성훈련 프로그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내 도농선교회 활동의 중심도 간사이 지역이어서 주로 도쿄에 있던 재식은 다케나카를 비롯한 이 지역 그룹들의 긴밀한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이들과 맺은 우정과 팀워크는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 활동에 버금갈 정도로 돈독했다. 긴급회의가 한반도 문제에 집중했다면 간사이 그룹들은 아시아의 도시빈민·노동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었다.
간사이 그룹에는 도시샤대의 후카다 교수, 간사이 세미나하우스의 히라다 목사, 나니와 교회의 미요시 목사,
반도 문제에 열중해준 이누마 교수, 오사카 한국기독교연합센터 간사인 이청일 목사, 간사이 도농선교회의 고야나기 목사, 전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 총간사인 마에지마 목사, 히가시우메다교회의 세노 목사, 구와바라 목사, 고다 목사, 간다 교수 등등 수많은 재식의 후원자들이 있었다.
87년 말 아시아협의회의 본부가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쫓겨나 일본으로 사무실을 옮겼을 때도 간사이 지역 회원들의 도움이 컸다. 이청일 목사는 5년 동안 재일대한기독교총회 건물의 사무실을 내주었고, 히라타 사토시 재일대한기독교총회 총무는 박상증 목사가 아시아협의회 총무로 일할 때 숙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간사이 그룹은 다케나카의 강력한 지도력 덕분인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돈독한 결속력을 보였다.
재식은 79년 도시농촌선교회 간사 임무를 마치고 신설된 국제부(IA)로 옮겨 계속 도쿄에 머물렀다. 국제부에서는 아시아지역 평화운동을 주요 업무로 삼았는데,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을 돕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기도 했다.
81년 국제부 간사 임기를 마친 재식은 이제 그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79년 ‘10·26 사태’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었던 한국대사관의 이원홍 공사가 마침 만나자고 했다. 서울대 종교학과 동창이었던 그는 공사로서 재식의 일본 내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재식은 그에게 한국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며칠 뒤 귀국해도 괜찮다는 연락을 해주었다. 꼭 10년 만이었다.
마침내 고대하던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재식은 물론 온 가족이 설레었다. 그런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조지 토드가 전화를 해서는, 그동안 힘들게 일했으니 잠시 머리를 식히고 귀국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고심 끝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재식은 한 학기 동안 하버드 신학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지낼 수 있었다. 토드는 생활비를 지원해주었고, 제임스 레이니는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다.
재식은 하버드대 기숙사에서 자취를 했는데, 그때 마침 다케나카 선생도 그곳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은 토요일 새벽이면 자주 항구로 나가 생선을 사왔고, 그러면 다케나카의 부인 후미코가 스시를 만들어 대접해주곤 했다. 일본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고 마무리까지 함께 한 다케나카와의 인연은 생각할수록 절묘한 일이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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