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은 1970년대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 시절 도쿄에서 여러 은인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왼쪽 사진은 재일동포 인권운동의 대부인 이인하 목사(가운데)가 78년 10월 도쿄의 선교 70돌 기념행사 때 파울 슈나이스(왼쪽) 등과 함께한 모습. 오른쪽 사진은 은사로 모셨던 스미야 미키오 도쿄대 교수.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2
1970년대 도쿄 시절 오재식이 맺은 가장 소중한 인연 중 하나는 재일동포 이인하 목사였다. 두 사람은 이미 63년 학생교류 프로그램에 따라 이 목사가 일본 학생들을 이끌고 서울에 왔을 때 처음 만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데 71년 재식이 도쿄의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로 일을 하러 갔을 때 바로 옆 사무실에 재일대한기독교총회(KCC)도 있었다. 그때 이 목사는 총회장 겸 총무로서 재일동포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동포 사회에서는 ‘마틴 루서 킹’ 목사로 불릴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그는 75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약칭 민주동지회·ICNDK)에도 동참하는 등 평생토록 재식을 돕고 보호해주었다.
1925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난 이인하는 15살 때 가족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민족차별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다. 그는 스승 와다 세이에게 영어 성경을 배운 인연으로 42년 세례를 받았고, 그의 누이동생인 사카이 사치코와 결혼도 했다. 59년 도쿄 근처 가와사키교회의 목사로 부임한 그는 선교와 함께 재일동포 인권보호 활동을 시작했다.
70년 동포 2세 박종석이 신입사원으로 합격했으나 뒤늦게 일본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당하는 ‘히타치 취업차별 사건’이 터지자 그는 맨 먼저 들고일어났다. 일본 정부가 일방적으로 동포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한 까닭에 빚어진 사건이었으나 동포 사회가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일본 교단의 목사들과 함께 ‘박종석군 복직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세계교회협의회(WCC) 인종차별퇴치 프로그램(PCR) 위원으로서 ‘히타치 제품 불매운동’도 벌여나갔다. 이에 동포 사회는 물론 일본 내 지식인들도 적극 호응하면서 결국 4년 만에 히타치는 박군을 취업시켰고, 일본 법원은 국적을 이유로 입사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발단이 된 취업차별 반대 운동은 외국인 지문날인 철폐운동으로 번졌다. 이 운동도 주도하던 이 목사는 외국인등록증의 지문날인을 거부해 출국을 할 수 없었고, 한국에 있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목사는 캐나다 장로교에서 재일대한기독교총회로 파견한 선교사인 메이비스 하인드만과 그 후임 돈 로스를 도농선교회에 보내 재식의 일을 도와주었다. 이 목사와 함께 활동하던 배중도 장로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재식이 이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가와사키교회를 다니면서 가족들도 형제자매처럼 어울려 지냈다. 복지시설 ‘후레아이관’과 복지법인 ‘청구사’를 설립해 동포는 물론 다른 외국인 노동자 보호에도 헌신하던 이 목사는 2008년 6월 소천했다.
재식이 정신적·학문적 멘토로 따랐던 스미야 미키오 교수를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도쿄대 노동법 교수로서 귀족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던 스미야 교수는 왕이 직접 왕실의 자문위원으로 추대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지만 천황제와 황궁에 대해서는 객관적 시각을 유지했다.
73년 박정희 정권에서 ‘잘살아 보세’를 구호로 새마을운동을 벌이자 재식은 지명관 교수와 함께 도쿄대로 스미야를 찾아갔다. 재식은 그에게 “박 정권이 말하는 한국 경제 발전의 허상, 군부독재를 호도하려는 선동적인 구호를 학문적으로 분석해달라”고 간청했다. 한참을 주저하던 스미야는 결국 승낙했고, 한국을 방문해 마산과 구미의 자유무역지대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고 국내 경제학자들과 토론한 뒤 <한국경제론>을 출간했다. 도농선교회가 지원하고 이와나미서점에서 나온 이 책은 박정희 프로파간다에 대해 여러 방향에서 학문적으로 점검하면서 70년대 한국 경제의 허상을 분석해냈다. 스미야는 도쿄대에서 은퇴한 뒤 74년 도쿄여대 학장을 맡아 지 교수를 전임으로 정식 임용해 월급도 대학에서 전담해주었다. 그는 ‘다가’(도큐멘테이션 포 액션 그룹스 인 아시아)를 운영했던 구라타 마사히코가 그만둔 뒤 ‘아시아 자료센터’를 새로 만들 때 두말없이 이사장을 맡아 재식의 짐을 덜어주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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