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국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기독인들의 국제적인 연대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진은 75년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김관석 총무의 일본 방문에 맞춰 도쿄 근교에서 열린 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의 첫 모임 때로, 오른쪽부터 이인하(재일동포), 김 총무, 강문규·김용복(일본 체류), 임순만(재미동포), 이상철(캐나다 체류), 필자·지명관(일본 체류), 박상증(스위스 체류), 양호민(일본 방문중), 동원모(재미동포). 사진 김용복 박사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0
1974년 ‘잔인한 4월’ 이후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오재식은 참담한 심정을 애써 눌러야 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인사들의 재판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을 졸였고, 특히 안재웅 간사를 비롯한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후배들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는 남몰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앞서 73년 김관석 목사가 일본으로 건너와 고텐바에서 모인 이후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국외 기독교인들은 서로 전화로 연락하며 국내 상황에 대한 걱정과 행동요령에 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이때부터 박상증 목사가 있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활동하던 이들로 구성된 한국 교회와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비공식 모임이 만들어졌다. ‘한국 기독자 민주동지회’의 태동이었다.
진보적 기독교인의 정신적 멘토였던 김재준 목사는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74년 3월 뉴욕에서 열린 북미주기독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 있었다. 김 목사는 이 대회에서 두 번에 걸쳐서 “대통령은 우상일 수 없다. 국민, 특히 기독교인은 우상 숭배에 굴종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그 때문에 김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눈 밖에 났고, 김 목사 또한 한국 교회가 싸움에 나서면 세계 교회가 함께할 것이며 이를 위해 국내에서 국외로 전선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에 머물고 있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민청학련과 관련해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심 재판 중 변론 내용이 문제가 되어 강신옥 변호사를 구속하는 전대미문의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 뒤 2심에서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으나, 민청학련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7명은 여정남을 빼고 모두 무기징역 이하로 감형했다. 그런 사이 국내에서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규탄대회가 열리고 외국에서도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박정희 정권은 75년 2월15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감행했고, 그 투표에서 찬성이 많이 나타나자 특별조처를 내려 민청학련 관련자 대부분을 석방했다.
그렇지만 사형을 선고받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7명과 민청학련의 여정남은 75년 4월8일 대법원의 상고 기각이 있은 지 20시간 만인 9일 새벽 전격 처형을 당했다. 그 뒤로도 박 정권은 민주화운동 및 인권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을 없애기 위해 75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풀려난 지 두 달 정도 된 박형규 목사를 비롯해 권호경 목사, 김관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다시 구속시켰다. 이른바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 사건이다. 한국의 수도권 빈민선교 사업을 위해 받은 세계급식선교회의 원조자금 중 일부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실무자의 가족을 돕고 교육장소 사용료로 쓴 것을 횡령죄라고 꼬투리를 잡았던 것이었다.
점점 열악해져 가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인권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던 세계협의회는 한국교회협의회의 총무마저 구속당하는 사건이 생기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해 5월 세계협의회의 중앙위원인 윌리엄 톰슨, 폰 바이츠제커 박사, 국제문제위원회의 레오폴도 닐루스 그리고 아시아교회협의회의 의장 시마투팡 박사 등이 대표단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이때 미국교회협의회 대표도 함께 왔다.
세계협의회 제네바 본부에 있던 박 목사는 캐나다의 김 목사와 자주 연락을 하면서 기독동지들이 개인적인 협조 차원이 아니라 조
직을 통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며 김 목사에게 그 구심점 구실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김 목사도 쾌히 승낙을 했다.
특히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전격 사형집행을 계기로 한국의 군사정권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에큐메니컬 동지에 대한 동정심과 연대의 분위기도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기독단체들이나 교회에서 한국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국외 한인 기독자들은 독일, 스웨덴, 미국, 캐나다, 일본 등등 전세계 교회와 단체들이 연대할 수 있도록 물밑작업을 벌여나갔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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