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터진 민청학련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안재웅 간사를 비롯한 기독운동 인사들이 대규모로 구속되자 세계교회협의회와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전세계 교회와 인권단체가 나서서 이들의 석방운동을 벌였다. 사진은 75년 2월15일 특사조처로 풀려난 박 목사가 서울구치소 앞에서 가족과 교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9
1973년 10월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기독학생운동은 각 교회 대학생회 단위의 기도회와 시위를 병행하며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기생총연맹)은 12월부터 매춘관광과 한-일 경제유착의 실태를 폭로하는 자료를 발간하는 등 ‘반일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74년 초가 되자 전국적으로 학생운동도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경북대를 시작으로 서강대·연세대·서울대·이화여대·고려대 등에서 학생들은 유인물을 뿌리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그해 4월3일 ‘긴급조치 4호’로 대응했다. ‘교내외의 집회·시위·농성을 금지하고, 시위 주동자에게는 최고 사형을 구형할 수 있다’는 초강경·초법적 내용이었다. 이어 정권은 ‘긴조 1·4호’를 무기 삼아 무려 1024명을 잡아들여 그 가운데 180여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으로 엮어서는 그 배후세력인 인혁당과 함께 체제를 전복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에는 학생 114명을 포함해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찬국·김동길·이우정 교수, 김지하 시인 등 각계 지도급 인사들도 줄줄이 엮여 투옥되었다. 또 기생총연맹 활동의 주축 멤버였던 안재웅·이직형·정상복 등 거의 전원이 투옥되는 바람에 기독학생운동도 최대의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해 5월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은 ‘민청학련’ 수사보고서를 통해 “이철·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 학생이 핵심이 되어 73년 12월께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면서 그 과정에서 서도원·도예종 등의 인민혁명당계 지하 공산세력,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계열, 과거 불순 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조영래 등 용공불순 세력, 일부 종교인 등 국내의 반정부적 인사, 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 세력 등 여러 세력과 결탁하여 반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뒤 전국에 걸친 유혈 폭력혁명으로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궁극적으로는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했던 국가변란 기도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청학련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통해 조작된 정권의 음모였다는 사실은 바로 이듬해부터 폭로됐고 밝혀졌다.
이때 민청학련 사건에 윤 전 대통령까지 엮이게 된 것은 박형규 목사로부터 비롯됐다. 어느날 기생총연맹 회원이자 박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던 오장동 서울제일교회 신자인 나병식이 기생총연맹의 안재웅 간사를 찾아왔다. 안 간사는 서울제일교회 대학부 부장이기도 했다. 그는 시국도 복잡해지는데, 기독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할 수 있는 모임 장소가 필요하다며 전세방을 구할 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지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한 안 간사는 박 목사에게 자금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만한 여유자금이 없던 박 목사는 종종 도움을 받았던 윤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는 안국동 자택을 찾아가 아침신문에 메시지를 써서 들여보냈고, 이를 받아본 윤 전 대통령은 부인 공덕귀 여사에게 45만원을 내주었다. 공 여사는 이를 평소 친분이 있던 이우정 교수를 통해 박 목사에게 건넸고, 이는 다시 안 간사를 통해 나병식에게 전달되었다. 물론 박 목사는 그 돈의 쓰임새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기에 윤 전 대통령이나 이 교수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 자금의 흐름이 박 목사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지자, 민청학련을 북한의 지원을 받는 용공세력으로 옭아매려던 정권의 계획은 애초부터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국외에서는 한국 민주화 지원 운동이 한층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먼저 국제앰네스티 본부에서는 74년 7월초 미국인 변호사 윌리엄 버틀러를 한국에 파견해 민청학련 사건을 비롯해 긴급조치 위반 사건들을 조사하도록 했다. ‘버틀러 보고서’를 토대로 앰네스티는 한국 정치범의 석방을 촉구했고 전세계 앰네스티 지부와 회원들은 일제히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또 그해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회는 한국과 필리핀의 인권상황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두 나라 정부에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고 교회들도 석방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10월 중순에는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 조사단 5명을 파견해 한국내 기독교계 지도자와 기생총연맹 이사, 구속자 가족 등을 만났다. 그 뒤 75년 9월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 유럽대회에서 ‘유신체제를 철회하고, 날조한 민청학련 학생들에 대한 재판을 중단하며, 한국 기생총연맹의 합법적인 활동에 대한 탄압과 고문을 중단하라’는 공개탄원서를 한국 정부에 발송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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