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5월부터 일본 잡지 <세카이>에 연재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 15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인 기요코(왼쪽 둘째)와 세 자녀들까지 ‘자료 운반’을 해준 독일인 파울 슈나이스(맨 오른쪽) 목사 가족처럼 외국인들의 헌신적인 협력이 있었다. 사진은 76년 5월 ‘3·1명동사건’ 구속자들의 재판을 참관하러온 슈나이스 목사 가족이 서울 안국동 고택에서 윤보선(오른쪽 둘째)·공덕귀(맨 왼쪽) 전 대통령 부부와 함께한 모습.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7
1973년 5월부터 <세카이>(세계)에 지명관 교수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쓰기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바빠진 것은 오재식이었다. 매달 새롭고 특별한 내용으로 기사를 쓸 수 있을 만큼 한국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자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가 주로 보내주었다. 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이경배 국장과 윤수경 간사를 비롯해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학생들과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 등의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현장에서 모아온 자료들이었다.
이 자료들이 박정희 군사정권의 서슬 푸른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재식의 손에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외국인 ‘개미떼’ 협력자들의 공이었다. 선교사는 물론이고, 외국 언론인들도 자발적으로 상당수 협조해주었다. 중앙정보부(중정)는 물론 세관에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대사관의 외교행낭(특별 포스트백)을 이용하라고 알려준 것도 한국 주재 외국 언론인이었다. 그들은 꼬투리가 잡히면 상당히 곤란해질 텐데도, 도쿄에 파견 나와 있는 중정 직원들의 감시를 따돌리며 재식이나 지 교수를 만나 직접 전해주거나 도청이 어려운 공중전화로 중요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외교행낭을 이용할 때면 각국 대사관의 협조도 뒤따랐다.
재식이 아시아교회협의회 안에 만든 자료센터, 도큐멘테이션 포 액션 그룹스 인 아시아(DAGA)의 연구원인 미국 선교사 패리스 하비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료를 운반해 왔다. 자료를 담배처럼 말거나 골프채 가방 안쪽을 찢어 그 안에 넣는 식이었다. 여성조직 활동가 시오자와 미요코도 많이 도왔다. 그는 한번은 유리상자에 들어 있는 한복 인형의 치마에다 자료를 숨겼는데, 유리여서 객석으로 들고 탈 수 없다고 해서 부랴부랴 자신의 속옷에 자료를 숨겨 온 적도 있었다.
가장 기억해야 할 자료 운반책은 75년 일본으로 파송된 독일 동방선교회의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였다. 그는 안병무 박사가 동방선교회의 지원으로 독일에서 공부할 때 인연을 맺어 한국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지녔다. 그는 73년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 선생이 도쿄에서 납치당한 사건을 계기로 친구들인 안병무·서남동·강원용 등에게 위험이 닥칠까봐 한국을 오가기 시작했다. 또 그는 76년 6월 ‘3·1 민주구국선언’(명동성당 사건) 때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김대중·함석헌·김승훈·문익환·안병무·서남동 등의 재판 과정을 한번만 빼고는 모두 참관했다. 당시 독일 여권자는 비자 없이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그는 주말이면 한국으로 건너가 자료를 챙겨 오곤 했다. 결국 그는 78년 12월 중정의 감시망에 걸려 홍콩으로 추방당했다. 중정은 그가 75년부터 78년 사이 50회 이상 한국을 방문했다고 발표했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오갔다. 이후 그의 한국 방문길이 막히자, 이번에는 그의 일본인 아내 기요코와 세 아이들까지 나섰다. 슈나이스 가족은 아이들의 책가방에 넣거나 하는 방법으로 84년까지 200회 넘게 서울을 방문해 자료를 날랐다.
재식은 처음 만난 사람들도 설득해 ‘개미’로 활용했다. 한번은 스웨덴의 여성 기자가 한국 취재를 가는 길에 도쿄에 들렀다. 그는 당시 스웨덴에 있던 신필균을 비롯한 기독자네트워크 동지들로부터 도쿄에 있는 재식을 만나야 한국에 대해 제대로 취재할 수 있다고 소개를 받았던 것이다.
재식은 그를 만나러 찻집으로 가는 길에 담배와 성냥을 한통 산 뒤 성냥갑에 조그만 녹음테이프를 넣었다. 재식은 한국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준 뒤 “혹시 담배 피우시오?”라고 물었다. 그는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재식은 할 수 없이 본심을 밝히고, 그 담배와
성냥갑을 김관석 총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총무를 만나면 누구보다 제대로 한국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성냥갑을 열어 보였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는 녹음테이프를 본 그 기자는 손사래를 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국제기자회 수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규칙은 나도 알고 있지만 상황이 급할 땐 우선순위라는 게 있다. 의사도 자신들만의 규칙이 있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선 그것을 위반하기도 한다. 이 테이프를 전달하는 일도 크게 보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재식의 간곡한 호소에 그 기자는 승낙을 했고, 테이프는 무사히 김 총무에게 전달됐다.
훗날 김 총무는 재식에게 ‘그때 그 테이프 받고 울었다’고 얘기했다. 유명한 뉴스진행자가 된 그 기자는 한국 민주화를 돕는 스웨덴 그룹인 ‘한국위원회’에도 동참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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