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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나홀로 소주 한잔’으로 버틴 김관석 목사 / 오재식

등록 2013-04-07 21:21

1973년 김관석 총무(맨 오른쪽)와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의 만남을 계기로 결성된 한-일 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연대는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지지대 구실을 했다. 사진은 70년대 중반 도쿄를 방문한 김 총무와 필자, 지명관 교수가 함께한 모습.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73년 김관석 총무(맨 오른쪽)와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의 만남을 계기로 결성된 한-일 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연대는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지지대 구실을 했다. 사진은 70년대 중반 도쿄를 방문한 김 총무와 필자, 지명관 교수가 함께한 모습.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5
197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김관석 총무와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의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가 형제 같은 정을 맺게 된 것은 개인적인 친분 그 이상이었다.

훗날 일이긴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제연대가 확장되고 활발해지자 각각의 성격과 그것이 한국 운동에 미치는 영향 등을 평가하는 일도 만만치 않게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세계 각지에서 한국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일본의 총련과 같이 이른바 친북 성향의 단체와 개인들도 있어서 미묘한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오재식은 국제적 연대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가 정보의 분석과 신빙성 확인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는 무엇을 위한 연대냐 하는 것이었는데, 연대는 약한 자의 처지를 강화하고 지원하는 것이어야지, 강한 쪽으로 약한 쪽이 흡수돼서는 안 된다는 기본 생각을 늘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말로는 쉬웠지만 실제 상황에서 적용하고 실천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반공노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주의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과 교류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였고, 북한과도 국교 정상화는 안 되었으나 민간 차원의 왕래는 있던 편이었다. 더구나 일본 사회에서 총련계 활동도 활발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한국내 민주화운동을 친북 활동으로 몰아붙여 탄압했기 때문에 개발독재를 비판할 때 사회주의적 논리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문제를 삼았다. 또 국외에 있는 어떤 단체라도 친사회주의적 집단과 연계가 있거나 접촉했다는 의혹을 사면 국내 민주화운동의 입지를 뒤흔드는 꼬투리가 됐다.

이렇게 여러 차원의 반작용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서 재식을 돕는 일본 사람들은 일본 사회의 성향과는 관계없이 철저하게 한국 민주화운동의 노선과 입지를 옹호하는 것이 올바른 연대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김-나카지마 총무의 친분은 한-일 연대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재식은 김관석 목사를 민주화운동사에서 제 몫 이상을 해낸 인물로 평가했다. 지명관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한국교회협의회에서는 68년 김 목사가 기독교 기관들의 지지로 총무가 되자 교단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래서 70년 임시총회를 열어 세계교회협의회(WCC)처럼 한국도 교단들만 참여하는 협의체로 만들었지만 김 목사는 조용하면서도 탁월한 지도력으로 72년과 76년 총회에서도 재선임됐다. 그는 60년대 <기독교사상>을 중심으로 한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시대적 갈등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기를 갈망했다. 그 열망이 그를 더욱더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게 했다고 재식은 믿었다.

김 목사가 일본에 올 때면 언제나 재식이 수행하고 배석했는데,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나카지마 목사를 비롯한 친한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말수가 아주 적었다. 그는 큰 소리 내지 않고 흥분하지도 않으며 또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만큼 그의 삶의 자세가 훨씬 더 강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선동하는 언사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중을 지원하는 행동대장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김 목사는 재식에게 자신이 꾸미거나 관계하지 않은 사건에 말려들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 적이 종종 있었다. 그는 그렇게 늘 주변에서 일이 생겨 감당한 것일 뿐이라고 겸손을 보였으나 그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사건이 되살아나곤 했다. 숱한 사람을 죽이거나 죽게 하고도 끄떡없는 군사정권에 맞서서 아주 연약한 자세로 자기 발걸음을 지켜낸 부드러움, 그것이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김 목사의 힘이라고 재식은 생각했다. 아주 단순하고 주저앉기 쉬운 선비 같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던 힘은 그의 부인(김옥실)에게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고 재식은 말했다.

언젠가 그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80년까지 총무를 맡았던 김 목사는 점심에는 회식을 하지만 특별한 행사 일정이 없으면 저녁에는 일절 약속을 잡지 않고 일찍 귀가했다. 그럴 때면 그는 소주를 딱 한 잔 마시고 쉰 다음 저녁식사를 했다. 민주화운동의 한 중심에서 워낙 주시받는 위치였던 그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지키고 약점 잡힐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저녁 회식 자리 자체를 멀리하려 했고, 밖에서 받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고민을 소주 한 잔 마시고 한숨 한 번 쉬는 것으로 혼자 풀었던 것이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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