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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김관석 총무 ‘부활절 구속사태’ 전하다 통곡 / 오재식

등록 2013-04-04 19:44

1973년 여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오른쪽)는 일본 방문을 계기로 각별한 우정을 나눈 일본교회협의회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왼쪽)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사진은 70년대 중반 일본에서 열린 한-일교회협의회 주최 심포지엄에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73년 여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 목사(오른쪽)는 일본 방문을 계기로 각별한 우정을 나눈 일본교회협의회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왼쪽)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사진은 70년대 중반 일본에서 열린 한-일교회협의회 주최 심포지엄에서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4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와 그 일행이 투옥된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총무 김관석 목사가 도쿄를 방문했다. 그를 만나고자 기독 동지들이 모이기로 했다. 이즈음 이미 도쿄에도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퍼져 있었기에 매사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오재식은 후지산 아래 고텐바라는 작은 도시의 여관을 장소로 정했다. 지명관·김용복 교수, 강문규 선생, 재일동포 이인하 목사,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의 나카지마 마사아키 총무 등 10여명이 모였다.

그때 김 목사는 부활절 예배사건을 비롯한 국내 상황을 간추려 설명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는 동안 그의 목소리가 점점 젖어 들어갔다. 그러다 그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더니 창가로 가서 그야말로 엉엉 통곡을 했다. 평소 ‘꼬장꼬장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반듯했던 김 목사가 그처럼 소리내어 우는 모습을 보고 모두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 못하던 김 목사는 재식이 어깨를 안아 위로하자 겨우 진정을 할 수 있었다.

김 목사는 68년 교회협의회의 총무로 선출되었다. 당시 협의회에는 각 교단과 기독교 기관들이 모두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교단의 배경이 없었던 김 목사는 기관들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이 됐다. 그때 박 목사를 비롯한 기관장들의 도움이 컸다.

71년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밀어붙이고 72년 영구집권을 위한 긴급조치령을 선포했을 때 가장 먼저 저항한 세력은 산업선교에 참여하고 있던 젊은 목사들과 기독학생회총연맹의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연수를 거친 기독학생들이었다. 이때 박 목사는 훈련은 되지 않았지만 열정으로 가득 찬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김 목사는 이미 교분이 두터워진 그를 기독교 신앙의 행동모델로 믿기 시작했다. 그런 동지가 감옥에 갇혔으니 김 목사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사실 재식처럼 외국에 있던 사람들은 국내 상황을 늘 주시하고 있으면서도 군사정권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다. 고텐바 여관에 모인 사람들은 김 목사의 울음을 통해 군사독재집단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힘겨운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식을 비롯한 기독 동지들은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는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따로 지침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침묵을 강요당했을 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것을,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을 성서를 통해 배웠을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불의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유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이들을 긴장시켰고 또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들뜨게 만들었다. 이들은 비로소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하며 점차 작전과 전략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연락망을 통해서 국내의 활동과 저항운동을 지원하기로 뜻을 모았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한편 이때의 만남을 계기로 나카지마 총무는 김 목사를 달리 보게 됐다. 그는 “김관석 목사 참 대단하다. 아주 착해서 모든 걸 혼자 참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울 줄도 아네”라며 매우 감탄했다. 그때부터 친해진 두 사람은 한국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며 점차 둘도 없는 형제처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나카지마는 김 목사를 꼭 ‘형님’이라 불렀다. 김 목사도 일본에 올 때면 재식과 나카지마만은 반드시 만나고 갔다. 그럴 때면 재식은 봉투를 따로 준비해 두었다가 김 목사에게 건네곤 했다. 나카지마와 식사할 때 형 체면을 살려 돈을 내라는 나름의 배려였다. 그 덕분에 김 목사는 나카지마가 식대를 내려 할 때마다 “잔소리 마, 내가 형 아니냐?” 하면서 봉투에서 돈을 꺼내 척척 내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재식은 빙그레 미소짓곤 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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