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월께 14살 소년 오재식은 둘째형 재길이 주선해준 지인의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탈출해 가까스로 월남했다. 38선은 미 군정장관의 명령에 따라 46년 5월22일 이후 허가 없이 통과할 수 없는 분단선이 됐다. 사진은 사진잡지 <라이프>에 실렸던 46년 겨울 38선 미군 경비초소의 모습이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0
1945년 일제 패망 직전 미국과 소련이 각각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고자 설정한 38선은 ‘8·15’ 이후 단순한 군사 분계선이 아니었다.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북한에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분단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북한에는 소련을 등에 업고 입성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자 토지국유화 같은 사회주의 독재를 피해 남쪽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특히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려는 기독교인이 많았다.
오재식도 재길 형님을 따라 47년 초부터 월남할 계획을 세웠다. 재길은 교회 다니는 것조차 사사건건 방해하는 공산당의 압박이 날로 심해질 것을 염려했다. 그러다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이 월남을 하기로 결정하자 그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막상 월남하려니 준비할 게 많았다. 우선 남행길을 도와줄 안내원부터 찾아야 했다. 당시 이미 군사 대치 중인 38선을 무단으로 넘는 것은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재길은 가족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다 잡히면 모두 다 위험하니 따로 월남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의 가족은 아이들까지 있어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릴 듯하자 재식을 먼저 보내기로 했다. 마침 그즈음 재길은 숭인중학교의 교사이자 산정현교회 교인인 한 가족이 월남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편에 재식도 따라가도록 주선했다.
재식은 그 교사 가족과 만나 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해주로 건너왔다. 열차에 감시인이 있다고 했지만, 다행히 재식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해주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안내원이 슬그머니 다가와 몇시까지 해변으로 나오라고 재빠르게 알려주고 지나갔다. 재식 일행은 약속 시간에 맞춰 일러준 장소로 가서 숨었다. 이제 배만 들어오면 안내원을 따라 타기만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연락 신호는 오지 않고, 경찰이 들이닥쳤다. 어디선가 정보가 샌 모양이었다. 다른 곳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우다닥 뛰어나갔다. “잡아랏!” 하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같이 있던 교사가 어린 아기를 안고 뛰기 시작하자 재식도 힘껏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아기를 안은 교사와 그의 부인, 소년 재식이 아무리 용을 쓰고 도망을 친다고 해도 건장한 경찰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재식 일행은 붙잡혔으나 다행히 경찰이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시키는 대로 밤길을 한참 걸어간 일행은 빈집으로 보이는 이층집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낼 모양이었다. 놀란 마음이 진정된 재식이 살펴보니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도 총을 든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
재식은 앞날을 걱정하며 뜬눈으로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흐르는 것 같았다. 그 교사도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알 리 없는 두살배기 남자아기는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조용한 침묵 속에 조심스런 숨소리만 들리기를 한참, 갑자기 그 교사가 발소리를 죽이며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계단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시를 하던 경찰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주저할 필요도 겨를도 없었다. 재식 일행은 슬그머니 그 집을 빠져나왔다. 아래층에 있던 경찰들도 자는 눈치였다.
무사히 집에서 빠져나온 재식과 일행은 무조건 힘껏 달렸다. 한참 뒤 숨이 차올라 멈추어 돌아보니 아무도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겨우 안도의 숨을 돌리고 보니 그다음 일이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경찰이 나타나는 통에 사라져버린 안내원을 다시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기 전에 몸을 숨길 만한 곳도 찾아야 했다. 새벽 동이 트기 직전 일행은 외딴 농가를 발견했다. 무조건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을 열어준 주인 할아버지가 뜻밖에도 얼른 들어오라며 손짓을 했다.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월남하려던 열댓명이 다 잡혀갔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 안에 꼼짝 말고 숨어 있으라며 방 하나를 내주었다. 한밤중에 찾아온 낯선 사람들을 맞아, 그것도 혹여 들키면 자신들도 위험할 수 있는데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 그 시절 순박한 우리네 인심이었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죽을 쒀 주었다. 곡식이 넉넉지 않으니 죽이라도 쒀 양을 늘린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낮에는 경찰이 수색을 나올 터이니 뒤안의 곳간에 숨어 있으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서둘러 나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급하게 나오라고 손짓하는 할아버지를 따라가니 어제 헤어졌던 우리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여 가라며 등을 떠밀었고, 할머니는 걱정스런 나머지 눈물까지 보였다. 목숨을 구해준 노부부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재식과 교사 가족은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이영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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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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