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직전인 1945년 5월, 12살 소년 오재식은 맏형이 노를 젓는 돛단배를 타고 목포로 나와 둘째형 재길이 있는 원산으로 떠났다. 사진은 일제 때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돛단배를 타고 물질 나갔던 추자도 주민들이 포구로 들어오는 모습이다. <제주 100년 사진집>에서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3
추자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동안 오재식이 잊지 못하는 광경이 하나 있다. 그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1936년 집안을 책임지던 재길 형님이 평양으로 떠난 이후 몸이 약한 맏형 대신에 셋째인 재규 형님이 집안일을 도맡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해가 저물도록 재규가 돌아오지 않았다. 정한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들어와 군불을 때 방을 덥혀 놓던 그였다. 재식은 걱정스런 마음에 재규 형님을 찾아 마을로 내려갔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 있어 황급히 뛰어가 보았다. 그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었다.
재식은 열려 있는 대문 틈으로 고스란히 그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재규는 그 집 마당 기둥에 뒤로 손이 묶인 채 매를 맞고 있었다. 호통 소리와 신음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어린 재식은 부모보다도 더 의지하고 있던 형님이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자리로 뛰어들 수 없었다.
어두워져서야 다리를 끄는 소리를 내며 재규가 돌아왔다. 그는 자는 척하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재규는 왜 이런 꼴이 되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렁께 뜬금없이 우리집 묘를 옮기라 안 하요.”
원인은 묫자리였다. 그 부잣집의 묫자리가 재식의 집안 조상들이 묻힌 자리보다 아래에 있었는데, 어느날 그 부잣집에서 무당에게 물어보니, 조상 묘 위에 다른 묘가 있어서 일이 안 풀린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가장 노릇을 하던 재규를 불러 묘를 이장하라고 했는데, 꼿꼿했던 재규는 단번에 거절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를 다짜고짜 묶어 놓고 마구 때렸다는 것이었다.
이불 속에서 그 얘기를 들으며 재식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려야 했다. 왜 이렇게 우리집은 힘이 없고 가난한가 하는 서글픔보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이런 식으로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분노의 눈물이었다.
재식은 일찍부터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부당한 현실을 여러번 체험해야 했다. 추자도에서의 어린 시절은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모순의 세상이었다. 그런데도 늘 참고 견뎌야 했다. 일본인들로부터 받는 멸시도 그렇지만 같은 민족끼리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처지가 너무도 달랐다. 하지만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품삯이라도 받아야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던 처지에서 화가 난다고 감정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재식은 살아오는 동안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이런 썅’ 하는 오기가 발동하곤 했음을 기억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끈하는’ 성미가 추자도에서의 경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1945년 5월, 12살의 재식은 맏형 재완이 젓는 돛단배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둘째형 재길이 있는 원산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배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천천히 목포항을 향해 나아갔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재식에게 개떡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남의 집에서 일해주고 받은 밀찌꺼기로 만든 개떡 다섯덩이가 들어 있었다. 거뭇거뭇하고 거친 질감의 개떡조차 재식은 한번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먼 길 떠나는 막내아들에게 뭐라도 해줄 것을 찾아보다가 요기라도 하라고 밤새 개떡을 만들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어쩌면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재식의 손을 잡고 딱 한마디를 던졌다.
“재식아, 핵교 공부 열심히 하고 댕겨 와 너는 꼭 추자도 면장 하그라.”
그 시절 어머니에겐 추자도 면장이 최고의 자리였다. 똑똑한 막내아들이 면장이 된다면 그동안의 고달픈 섬생활이 싹 가실 듯 믿었다.
재식은 점점 멀어져 가는 추자도를 바라보다 이내 눈길을 거뒀다. 재식의 머릿속에는 고향에 남겨진 부모 형제에 대한 걱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새 육지 위에서 새롭게 펼쳐질 날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오재식 구술
이영란/구술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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