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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 찾아서] 일본인 교사 횡포로 1년 늦은 초등입학 / 오재식

등록 2013-01-07 20:04수정 2013-01-07 22:39

1932년 추자도에 들어와 신양교회를 세운 방계성 전도사는 오재식 선생의 운명에 직간접으로 커다란 영향을 줬다. 그해 8월20일치 <동아일보>에 ‘제2회 학생 브나로드운동 각지 대원 소식’ 특집으로 ‘추자로 신양리 책임대원 방계성’ 이름의 활동 상황이 실려 있다.
1932년 추자도에 들어와 신양교회를 세운 방계성 전도사는 오재식 선생의 운명에 직간접으로 커다란 영향을 줬다. 그해 8월20일치 <동아일보>에 ‘제2회 학생 브나로드운동 각지 대원 소식’ 특집으로 ‘추자로 신양리 책임대원 방계성’ 이름의 활동 상황이 실려 있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
1932년 여름 방계성 전도사에 의해 추자도에 처음으로 신양교회가 세워졌다. 일본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에 대한 불만이 나올 것이고,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부추기며 선동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재식의 둘째형 재길은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당시 4년제였던 초등학교(추자공립학교 신양분교)를 졸업한 재길은 공부를 잘해 곧바로 학교 급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선생 한 명이 교회를 다니는 재길을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재길을 볼 때마다 교회를 나가지 말라며 협박하고 주먹질을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재길에겐 학교 급사 자리만큼 교회도 중요했기에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그 일본인 선생은 ‘교회와 급사 중에 하나만 택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생명과도 같은 교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날로 재길을 쫓아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 선생은 재길을 계속 괴롭혔고 끝내 추자도에서조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고민 끝에 재길은 방 전도사에게 편지를 썼다. 신양교회를 세운 1년 뒤 추자도를 떠난 방 전도사는 그즈음 부산 초량교회 때부터 따랐던 주기철 목사와 함께하고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다. 장문의 편지를 받고 사정을 알게 된 방 전도사는 재길에게 당장 평양으로 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재길은 그길로 짐을 싸 평양으로 향했다. 그때가 1937년이었다.

재식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릴 적 있었던 이 악연의 불똥이 입학 문제로 튀었다. 1941년 봄, 다른 동기들은 다 취학통지서를 받았는데 재식만 받지 못한 것이다. 맏형 재완이 학교에 가서 따졌지만 재길을 쫓아낸 그 일본인 선생이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어서 안 된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그 일본인 선생이 그 집 아이들은 절대로 학교에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한국인 선생들은 자신들에겐 아무 힘이 없다며 오히려 하소연이었다.

아침마다 동무들이 줄지어 학교 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던 재식의 마음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억울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어린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4년이 지나도록 일본인 선생이 잊지 않고 있으니, 학교에 간다는 것은 다 틀린 일이었다. 그는 부모나 형들 앞에서는 의젓한 척했지만, 스스로에게는 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슬픔과 서러움, 분노와 체념 같은 감정들은 마구 엉켜 붙어 있다가 때에 따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삐져나왔다.

그럴 때면 재식은 무작정 바닷가로 내려가 몽돌 자갈을 골라 어깨가 아프도록 수제비를 떴다. 숨이 끝까지 차올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바닷가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모든 게 귀찮아질 때면 언덕 위로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섬들, 무료한 날갯짓의 바닷새, 간혹 지나가는 배…매일 보아도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럴 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육지에 대한 동경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끓어 올랐다. 풀밭에 주저앉아 ‘삐비’(삘기)를 입안에 미어터지게 집어넣고 씹어대다가 푸 하고 뱉어 보기도 했다. 8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식은 앞으로도 학교에는 갈 수 없다는 현실 앞에, 그리고 이 섬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암울한 미래 앞에서 빈주먹만 불끈 쥐어 볼 뿐이었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서서히 체념하고 있을 무렵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제의 그 일본인 선생이 추자도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자도보다는 좀더 괜찮은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된 모양이었다. 일본인 선생이 없어지자, 그날로 상황은 확 바뀌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탓에 곧바로 학교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이듬해 3월이 되자 취학통지서가 날아왔다. 1년 늦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싶었다. 재식은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 덕분에 실력은 단연 월등했다. 2학년을 마치니 성적이 너무 좋다며 4학년으로 월반을 시켜 줬다. 결국 또래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학년 과정을 배우지 않고 4학년으로 들어왔지만, 재식의 성적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좋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 정리/이영란 작가

오재식 박사 추모사

오재식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지난해 11월14일 팔순 축하연과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출판 기념회를 한 지 꼭 50일 만에 우리는 오재식 선생님과 슬픈 이별의 시간을 맞았습니다. 그때도 이런 날이 찾아 올 것을 예감했으나 모두는 선생님께서 좀 더 우리 곁에 계시기를 소원했었지요. 평생을 하느님의 손발되어 사셨기에 이제는 하느님께서 그를 지키는 손발이 되어주실 것을 하늘 향해 다구치 듯 외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족들과 평생지기 친구들 그리고 교우들이 외치는 ‘사랑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평안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하느님 맡기신 쟁기를 들고 민족의 통일과 에큐메니컬한 세상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았고 소걸음을 걸으셨으니, 비록 우리 곁을 떠났으나 정작 하늘은 두 손 들고 선생님 오신 것을 환영할 것입니다.

그 옛날 전태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이라 선포한 죄로 선생님의 인생은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종교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나 현장을 개혁하는 운동가, 조직가로 살았고 세계를 하느님 육화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기에 선생님은 기독교 교회에 있어서도 이단자였지요. 하지만 피하고 싶고 눈길을 거두고픈 현장을 선생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꽃으로 알고 살았던 우리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고통의 향기를 즐겨 맡았고 그에 취해 그곳 사람들과 뒤엉키는 삶을 자신의 몫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 결과 현장의 사람들은 일어섰고 세상을 달리 보며 곳곳에서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오히려 뭇 현장이 자신의 시간을 새롭게 구성하여 삶 전체를 일깨운 주체가 되었음을 겸손히 고백했지요. 영생에 대한 답을 이처럼 풀고 가신 오재식 선생님은 참으로 큰 스승임이 틀림없습니다.

살아 생전 하느님께서 선생님에게 맡긴 일들은 참으로 고된 일이었습니다. ‘나도 일하니 너도 일하라’고 오재식이란 강직한 인물을 불러 세우신 것이겠지요. 평생을 누구보다 민족과 세계를 위해 일했으나 그는 언제든 숨은 조력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에서의 한국 민주화를 위한 그의 노력,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시절 아시아 빈국들을 위한 헌신, 월드 비전 회장으로서 북한 국수공장을 짓던 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통일위원장 재직 때 기초했던 민족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선언, 그밖에도 이 땅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 분열된 조직을 엮어내고 그것을 동력화해낸 일들 등은 기독교를 넘어 한국 역사가 기억하고 평가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이처럼 선생님은 길이 없던 시절 스스로 길을 만들고 길을 갔고 길이 되신 분입니다. 용기 없는 우리들에게 임종하는 순간까지도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그 길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셨던 영원한 젊은 청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을 사랑하는 데는 진보였으나 하느님을 향한 마음 한 구석에 보수를 품고 게셨습니다. 그렇기에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애하여 결혼했던 동갑내기 노옥신 여사를 비롯한 지인들을 두고 떠났으나 평소 그리던 많은 이들을 만날 것을 믿고 우리와 이처럼 이별하신 것이겠지요. 또한 사나 죽으나 마음은 고향인 남쪽 추자도와 북쪽 압록 강변에 동시에 있을 것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에 우리는 민족 통일을 위한 선생님의 염원이 이승에서도 지속될 것을 믿으며 고통스러우나 이제 선생님을 하늘로 보내드리렵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지난 반세기, 선생님 덕분에 기독교는 세상에 당당할 수 있었고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개인적으로 6년 전 겨자씨교회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나 뒤늦은 인연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함께 해온 것을 복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그리운 이들과 함께 영면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이정배/감신대 교수·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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