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추자도에 들어와 신양교회를 세운 방계성 전도사는 오재식 선생의 운명에 직간접으로 커다란 영향을 줬다. 그해 8월20일치 <동아일보>에 ‘제2회 학생 브나로드운동 각지 대원 소식’ 특집으로 ‘추자로 신양리 책임대원 방계성’ 이름의 활동 상황이 실려 있다.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2
1932년 여름 방계성 전도사에 의해 추자도에 처음으로 신양교회가 세워졌다. 일본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들에 대한 불만이 나올 것이고,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부추기며 선동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재식의 둘째형 재길은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당시 4년제였던 초등학교(추자공립학교 신양분교)를 졸업한 재길은 공부를 잘해 곧바로 학교 급사로 취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선생 한 명이 교회를 다니는 재길을 영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재길을 볼 때마다 교회를 나가지 말라며 협박하고 주먹질을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재길에겐 학교 급사 자리만큼 교회도 중요했기에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그 일본인 선생은 ‘교회와 급사 중에 하나만 택하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생명과도 같은 교회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날로 재길을 쫓아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 선생은 재길을 계속 괴롭혔고 끝내 추자도에서조차 살 수 없게 되었다. 고민 끝에 재길은 방 전도사에게 편지를 썼다. 신양교회를 세운 1년 뒤 추자도를 떠난 방 전도사는 그즈음 부산 초량교회 때부터 따랐던 주기철 목사와 함께하고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다. 장문의 편지를 받고 사정을 알게 된 방 전도사는 재길에게 당장 평양으로 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재길은 그길로 짐을 싸 평양으로 향했다. 그때가 1937년이었다.
재식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릴 적 있었던 이 악연의 불똥이 입학 문제로 튀었다. 1941년 봄, 다른 동기들은 다 취학통지서를 받았는데 재식만 받지 못한 것이다. 맏형 재완이 학교에 가서 따졌지만 재길을 쫓아낸 그 일본인 선생이 아직도 학교에 남아 있어서 안 된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그 일본인 선생이 그 집 아이들은 절대로 학교에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한국인 선생들은 자신들에겐 아무 힘이 없다며 오히려 하소연이었다.
아침마다 동무들이 줄지어 학교 가는 모습을 바라만 봐야 했던 재식의 마음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었다. 억울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은 어린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4년이 지나도록 일본인 선생이 잊지 않고 있으니, 학교에 간다는 것은 다 틀린 일이었다. 그는 부모나 형들 앞에서는 의젓한 척했지만, 스스로에게는 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슬픔과 서러움, 분노와 체념 같은 감정들은 마구 엉켜 붙어 있다가 때에 따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삐져나왔다.
그럴 때면 재식은 무작정 바닷가로 내려가 몽돌 자갈을 골라 어깨가 아프도록 수제비를 떴다. 숨이 끝까지 차올라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바닷가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모든 게 귀찮아질 때면 언덕 위로 올라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섬들, 무료한 날갯짓의 바닷새, 간혹 지나가는 배…매일 보아도 똑같은 풍경이었다. 그럴 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육지에 대한 동경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끓어 올랐다. 풀밭에 주저앉아 ‘삐비’(삘기)를 입안에 미어터지게 집어넣고 씹어대다가 푸 하고 뱉어 보기도 했다. 8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식은 앞으로도 학교에는 갈 수 없다는 현실 앞에, 그리고 이 섬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암울한 미래 앞에서 빈주먹만 불끈 쥐어 볼 뿐이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서서히 체념하고 있을 무렵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제의 그 일본인 선생이 추자도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자도보다는 좀더 괜찮은 곳으로 전근을 가게 된 모양이었다. 일본인 선생이 없어지자, 그날로 상황은 확 바뀌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탓에 곧바로 학교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 이듬해 3월이 되자 취학통지서가 날아왔다. 1년 늦게 시작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싶었다. 재식은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 덕분에 실력은 단연 월등했다. 2학년을 마치니 성적이 너무 좋다며 4학년으로 월반을 시켜 줬다. 결국 또래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학년 과정을 배우지 않고 4학년으로 들어왔지만, 재식의 성적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좋았다.
오재식 구술
구술 정리/이영란 작가
<한겨레 인기기사>
■ 박근혜는 유학파를 좋아해? 인수위 외국학위 18명
■ 김여진 “문재인 캠프와 관련있다고 ‘출연금지’”
■ 해고 8년만 정규직, 그러나…“혼자선 갈수없다”
■ ‘63빌딩 크기’ 소행성, 9일 지구와 ‘스치듯 안녕’
■ 가위질 없이 ‘있는 그대로’ 24시간 생중계 채널 뜬다
고 오재식 선생
| |
■ 박근혜는 유학파를 좋아해? 인수위 외국학위 18명
■ 김여진 “문재인 캠프와 관련있다고 ‘출연금지’”
■ 해고 8년만 정규직, 그러나…“혼자선 갈수없다”
■ ‘63빌딩 크기’ 소행성, 9일 지구와 ‘스치듯 안녕’
■ 가위질 없이 ‘있는 그대로’ 24시간 생중계 채널 뜬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