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남북서 나란히 명예졸업장…“종철아, 축하한다” / 박정기

등록 2012-04-24 20:15

2000년 10월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50돌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참석한 박정기씨는 김일성대학에서 수여한 박종철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전달받았다.(왼쪽) 이듬해 2월 열사의 모교인 서울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은 뒤 박씨는 교정에 서 있는 박종철 동상에 학사모를 씌워주며 아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0년 10월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50돌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참석한 박정기씨는 김일성대학에서 수여한 박종철 열사의 명예졸업장을 전달받았다.(왼쪽) 이듬해 2월 열사의 모교인 서울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은 뒤 박씨는 교정에 서 있는 박종철 동상에 학사모를 씌워주며 아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100
2000년 10월9일, 박정기는 남북단일기(한반도기)를 들고 고려항공 특별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김포공항을 이륙해 평양을 향해 날아올랐다.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남쪽 시민단체 대표와 각계 인사들을 초청했다. 방북단엔 전국연합 상임대표이자 유가협 회장인 박정기와 백기완·한완상·박용길·권낙기 등 42명이 포함되었다.

안내방송이 들려 창밖을 바라보니 평양 상공이었다. 지상엔 논과 밭,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남한 풍경과 다르지 않았지만 북녘 땅에 들어섰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논밭 사이로 길게 뻗은 도로가 인상적이었다. 안내원은 통일을 대비해 미리 닦아놓은 길이라고 설명했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민족화해협의회의 김령성 부회장과 환영객들이 방북단을 맞이했다. 일행은 북쪽에서 제공한 승용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평양 시가지에 들어서자 인도에 늘어선 시민들이 손을 흔들었다.

“반갑습네다.”

“통일! 통일!”

무리지어 춤를 추며 환영 인사를 대신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박정기는 가슴이 부풀어올라 차창을 열고 끊임없이 손을 흔들었다. 일행은 인파의 숲을 빠져나와 봉화초대소에 도착해 여장을 풀었다. 숙소에서 그를 담당하는 40대 중반의 안내원 양철식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평양을 떠날 때까지 항상 박정기 옆에 붙어 있었다. 표정이 밝고 친절하며 인정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짧은 평양생활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박정기가 훗날 두번째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그가 담당 안내원이었다.

일행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들쭉술이라 불리는 룡성주를 마셨다. 맛이 일품이었다. 모두들 분위기와 술맛에 취해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이튿날 10월10일은 북한의 8대 명절 중 하나인 노동당 창건일이었다. 방북단은 안내원을 따라 김일성광장으로 향했다. 일행은 주석단에 올라 행사를 관람했다. 박정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뒤편에 앉았다. 왼편엔 지난달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는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1만5천여명의 인민군과 백만 인파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조선인민군과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의 열병식이 차례로 열렸다.

행사가 끝난 뒤 주차장에 들어설 때 비전향 장기수 어른들이 버스에 탄 채 출발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박정기와 일행은 순식간에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방북단을 발견한 어른들도 창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6·15 공동선언에 따라 앞서 9월2일 북한으로 돌아왔다. 한달 남짓 전 송별행사 때만 해도 언제 다시 보게 될지 기약이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른 재회에 모두 들뜬 기분이었다. 그들은 말끔한 신사복에 금빛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박정기가 안부를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생활하고 계십니까?”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 당에서 다 먹고살게 해줍니다.”

남한에서 수십년 감옥살이로 고초를 겪은 그들이 송환된 뒤 안정적인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평양 땅을 밟은 지 닷새째인 10월13일 밤,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의 김령성 부회장이 봉화초대소를 찾아왔다. 방북을 마치는 아쉬움에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김령성이 박정기를 붙잡고 말했다.

“아드님의 졸업장을 들고 급히 찾아왔습니다. 87년도에 박종철 열사의 소식을 듣고 김일성대학에서 언어학과 명예학생으로 등록했습니다. 이게 졸업장입니다.”

그는 방북단 앞에서 명예졸업장에 적힌 글을 낭독했다. 옆에 있는 수행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이 졸업장은 박종철 열사의 졸업 연도인 89년에 만들었습니다.”

박정기는 졸업장을 꼼꼼히 살펴본 뒤 김령성에게 돌려주었다.

“북한의 최고 대학에서 제 아들을 기억하고 학생으로 예우해줘서 고맙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졸업장은 김일성대학에서 보관해 주십시오. 제가 평양에 다시 오게 되면 수령하겠습니다.”

그가 졸업장을 사양한 것은 혹여 보수우익단체들이 시빗거리로 삼아 남북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듬해 2001년 서울대에서 박종철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입학한 지 17년 만의 졸업이었다. 명예졸업장을 모란공원 아들의 가묘 앞에 안치하던 날, 박정기는 두 대학의 졸업장을 손에 든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아들의 졸업을 축하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돈보자기 받는 최시중, 브로커 운전기사가 ‘찰칵’
승무원 배꼽보여’ 트윗에 조현민상무 ‘명의회손’
최경주 선수 돈 23억 빼돌린 여직원, 부킹남에 빠져…
“동맥경화는 혈관 바깥의 지방 때문”
[내부자들] 종점 왔으니 갈아타는 거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공수처 “대통령실·관저 압수수색 진행 중” 1.

[속보] 공수처 “대통령실·관저 압수수색 진행 중”

권성동 “문형배, 이재명 모친상 조문”…헌재 “명백히 거짓” 2.

권성동 “문형배, 이재명 모친상 조문”…헌재 “명백히 거짓”

“윤 탄핵 인용하면 헌법재판관들 단죄” 조선일보 게재 광고 섬뜩 3.

“윤 탄핵 인용하면 헌법재판관들 단죄” 조선일보 게재 광고 섬뜩

명태균 변호사 “다리 피고름 차도 ‘특혜’ 투서…윤석열 병원행에 분개” 4.

명태균 변호사 “다리 피고름 차도 ‘특혜’ 투서…윤석열 병원행에 분개”

‘서부지법 난동’ 58명 중 56명 구속…“도주 우려” 5.

‘서부지법 난동’ 58명 중 56명 구속…“도주 우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