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의 135일간 장기농성에도 의문사 진상규명에 대한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 90년 10월 최동씨의 아버지 최수호씨가 화병으로, 이이동씨의 아버지 이춘원씨는 자살로 자식의 뒤를 따랐다. 사진은 90년 8월 ‘고문후유증’ 끝에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최동씨의 장례행렬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81
1990년 10월16일 유가협 회원 최수호(최동의 아버지)가 서울대병원에서 운명했다. 뚜렷한 병증이 없는 화병이었다. 아들 최동의 49재를 지낸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아들이 떠난 뒤 사람을 꺼려 가게를 정리하고 유가협 외엔 일절 외출하지 않았다.
비극의 시작은 아들의 죽음을 부른 고문이었다. 최동은 성균관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그 뒤 부천의 프레스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87년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를 결성해 활동하다 89년 4월 국가보안법 혐의로 강제연행되었다. 이때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20여일 동안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칫솔대를 날카롭게 갈아 자신의 목을 찌르고 머리를 양변기에 찧으며 자살을 기도했다. 출소 뒤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분열증을 겪으며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90년 8월7일 최동은 한양대에서 분신으로 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유서는 고문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었습니다.”
민가협에서 활동하던 최수호·김순옥 부부는 아들이 떠난 뒤 유가협 회원이 되었다. 유가협 회원들 중엔 민가협에서 건너온 이들이 여럿 있다.
박정기는 소식을 듣고 서울대병원에 찾아갔다. 아들 최동에 이어 남편까지 잃은 김순옥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박정기는 고문이 빚은 한 가족의 비극 앞에서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운동가들이 고문당한 뒤 정신분열증과 폐쇄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박정기는 ‘고문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몇해 전의 다짐을 다시 가슴에 새겼다. 이날의 다짐은 훗날 ‘문국진과 함께하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최수호가 세상을 떠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1월12일 이춘원(이이동의 아버지)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남은 이들에게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이춘원은 서울 서초동의 판잣집에 살며 아들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싸워왔다. 아들 이이동은 전남대 출신 16인의 열사 중 한 명이다. 대학시절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보안대의 관찰 대상이었던 그는 군대 내 비민주적인 관행을 거부한 일로 고참들의 구타에 시달렸다. 87년 6월15일 오후 부대에서 충정교육이 있었다. 교육을 담당한 대위가 말했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왜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나서는 병사가 없자 대위는 이이동을 지목했다. 이이동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말했고, 분노한 대위는 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부동자세로 이이동을 세운 대위는 군홧발로 그의 낭심을 가격했다. 실신한 채 내무반으로 실려간 이이동은 몇십분 지나지 않아 부대 뒷산에서 총살당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춘원은 기독교회관 농성장으로 스스로 찾아왔다. 135일 동안의 의문사 진상규명 요구 농성을 벌였지만 아들의 죽음을 밝히는 일은 요원했다. 아들을 잃은 뒤 그는 술에 의지한 채 몸을 돌보지 않았다. 유가협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다. 박정기는 그와 자주 술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박정기는 말수 적고 멋쩍게 웃는 그의 표정을 좋아했다. 언젠가 그가 박정기에게 말했다.
“남 보는 데서 웃는 것도 죄스럽고 밥 먹는 것도 미안해요.”
“끼니는 꼭 챙겨드셔야 합니데이. 그기 아들의 뜻입니더.”
몸을 잘 돌보라는 박정기의 말에 그는 씨익 웃을 뿐 대답이 없었다.
박정기는 뚜렷한 진전 없는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이 그를 좌절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이이동은 군 의문사였다. 의문사 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미제로 남는 것이 군 의문사였다. 일반 의문사와 달리 증인을 찾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박정기는 서울 서초동 법원 앞 무허가 비닐하우스촌, 흔히 ‘꽃마을’로 불리던 곳으로 찾아갔다. 이춘원의 마지막 삶의 보금자리는 다섯평 남짓한 움막이었다. 박정기는 빈민장으로 장례를 치러 의문사 진상규명이라는 고인의 뜻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가족과 친척들은 가족장을 원했다. 밤새 논의를 했지만 설득할 수 없었다. 11월24일 유가협은 한울삶에서 이춘원의 추모식을 열었다. 추모식에서 이이동의 누나 이순희가 맹세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뒤를 이어 진상규명 투쟁을 하겠습니다.”
의문사 투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지난한 도정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어도 떠난 자식이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