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1일 연세대 총학생회가 축제 기간에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를 상영하자 경찰은 대규모 전경대원을 교정에 투입해 영화를 본 학생들까지 무더기로 연행했다. 휴가 나왔던 한 군인은 전경들에게 붙잡혔다가 유가협 회원들과 기자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80
1990년 9~11월 대학가의 대동제를 돌며 유가협이 연 장터에는 후원회원들도 일손을 보탰다.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저마다 설거지를 하고 배식을 하며 분주했다. 특히 이계남(우종원의 어머니)은 ‘손님’을 끌어오는 데 열성이었다.
“순대보다 맛있는 파전 사이소!”
학 학생이 그에게 부탁했다.
“저, 돈이 없는데 500원어치만 사면 안 돼요?”
“파전 두 개 더 가져와라. 학상! 먹고 모자라면 또 와.”
그러자 간사 정미경이 이계남을 나무랐다.
“어머니, 장사를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자꾸 퍼주면 쫓겨나는 수가 있어요.”
“내는 쫓겨나도 좋아. 배고픈 학생을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나?”
음식을 담는 어머니들의 손은 크고 넉넉했다. 어머니들은 학생들의 얼굴을 살핀 뒤 유가협을 아는 것 같은 기색이면 아낌없이 퍼주었다. 유가협 장터는 유가족들의 숨은 장기를 발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영자(신장호의 어머니)는 한번 눈에 띈 손님은 절대 그냥 보내지 않는 장사 수완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사를 마친 뒤 김밥이 남자 직접 들고 다니며 파는 열성을 보여주어 박정기를 감탄하게 했다.
총무 최봉규(최우혁의 아버지)는 시장 보는 데 일사천리였다. 박창호(박영진의 아버지)는 맛보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떡볶이를 만들어냈다. 순대는 배은심을 따라갈 이가 없었다. 진한 국물맛을 우려낸 정정원(김윤기의 어머니)의 오뎅도 일품이었다. 박정기는 여느 때처럼 장터 주변을 끊임없이 오가며 주변 쓰레기를 치웠다. 마치 ‘모든 쓰레기는 내 차지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배은심과 허두측(김종태의 어머니)은 다른 곳의 장터에서 배워야 한다며 이곳저곳 둘러본 뒤 말했다.
“뭐 별거 없드라. 근디 우리가 더 후하고 맛있긴 헌디 조직적이지 못헝께 쬐께 서툰 것이제. 담부턴 좀더 조직적이어야 한당께.”
박정기는 틈날 때마다 장터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학생들에게 알렸다.
“어. 이 앞을 지나치는 학생·시민 여러분,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여 앞에 있는 사진들을 봐주십시오. 이 사진은 의문사당한 희생자들의 사진입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좋으니까네 와서 우리들에게 문의를 해주십시오.”
장터 천막엔 대형 사진을 둘러치고 주변엔 열사 대자보를 전시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겐 희생자 자료집 <나의 죽음을 헛되이하지 말라!>를 나눠주었다. 유가협 장터는 기독교회관 의문사 농성 투쟁의 연장이었다.
다른 곳과 분위기가 사뭇 다른 장터 앞에서 학생들은 걸음을 멈추고 열사 대자보를 읽었다. 대자보 전시를 꺼리는 유가족도 있었다. 박정기는 바람 앞에 펄럭거리는 대자보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다.
“즐겁게 일하다가도 자식들 사진이 펄럭거리면 와 괴롭지 않겠나?”
대학생들의 흥겨운 축제의 자리에 열사 대자보 전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모이는 자리인데다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는 학생들이라면 거부감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90년 한 해 동안 세 차례의 대동제 장터에서 얻은 수익금은 외부 빚을 갚는 데 썼다. 이후 유가협은 15년 동안 대학가 축제 일정에 맞춰 해마다 장터를 열었다. 유가협의 장터 소식을 듣고 서울 소재 총학생회에서 장터를 요청하는 연락도 잦았다. 장터를 열면 총학생회와 각 대학의 열사 기념사업회 학생들이 일을 도왔다.
연세대 대동제에서 장터를 열었을 때는 총학생회 주관으로 북한 영화 <꽃 파는 처녀>를 상영했다. <꽃 파는 처녀>는 북한의 혁명가극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대학가에서 관람 열풍이 불고 있었다. 정부에선 당국의 승인 없이 북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다며 전경들을 교내에 진입시켰다. 장터가 한창일 때 갑자기 전경들과 페퍼포그 차량이 진입해 최루탄을 난사했다. 전경들은 영화를 관람한 학생들을 연행했다. 박정기와 유가족들은 학생들을 잡아가지 못하게 막았다. 휴가 나온 군인들이 연행될 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군인들을 끌어당긴 뒤 전경들을 설득했다.
“호기심에 영화를 본 사람들일 뿐입니다. 당신들과 같은 군인들 아닙니까? 잡혀가면 영창에 끌려가니 연행하지 마십시오.”
전경들이 물러난 뒤 유가족들은 영화 상영 투쟁을 전개한 학생들에게 김밥·파전 등 남은 음식을 모두 나눠주었다.
박정기에게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90년 10월30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장터였다. 그때 장터를 돕기 위해 찾아온 김귀정 학생을 처음 만났다. 유가족들은 김귀정을 처음 보았지만 그는 전부터 유가협 활동에 관심을 갖고 일을 돕던 학생이었다. 김귀정은 정미경 간사가 운영하는 성균관대 앞 찻집 ‘마른 잎 다시 살아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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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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