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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90년 3당 합당에 맞서 ‘열사 합동추모제’ 준비 / 박정기

등록 2012-03-22 20:14

유가협은 1990년 1월 집권 여당과 두 야당이 손을 잡은 ‘3당 합당’을 야합으로 규탄하는 뜻에서 6월항쟁 기념일에 맞춰 처음으로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를 열었다. 그해 6월9일 성균관대 교정에 마련된 합동추모제의 제단에 걸개그림과 열사 112명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유가협은 1990년 1월 집권 여당과 두 야당이 손을 잡은 ‘3당 합당’을 야합으로 규탄하는 뜻에서 6월항쟁 기념일에 맞춰 처음으로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를 열었다. 그해 6월9일 성균관대 교정에 마련된 합동추모제의 제단에 걸개그림과 열사 112명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작가 박용수씨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7
1990년 1월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은 청와대에서 회동한 뒤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서 만든 민주자유당은 일시에 여소야대 정치지형을 바꾼 거대 여당이었다. 3당 합당은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집권당과 야당이 결합한 사건이었다.

3당 합당 이후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학생·노동자의 분신과 투신이 줄을 이었다. 특히 3당 합당은 민주화운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부산·경남 지역의 정치적 보수화를 불러왔고, 호남을 고립시키며 지역주의를 고착시켰다. 노무현·김정길 등 8명의 국회의원은 이에 반발해 이른바 ‘꼬마 민주당’을 창당했다. 통일민주당의 3당 합당 결의대회에서 노무현은 손을 들어 외쳤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합시다!”

그의 외침이 묻히던 순간, 통일민주당 당사 바깥에선 유가협의 유가족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3당 합당은 유가족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유가협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일부 정치인들이 군부세력과 야합해 민주세력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한 것으로 판단했다. 유가족들은 회의를 열어 3당 합당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 대응 방안을 논의하던 중 6월항쟁 시기에 맞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열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자는 의견이 나왔다.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명확히 하고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박정기는 적극 찬성했다. 한울삶 한 벽면에 열사들의 영정을 모아놓긴 했지만 그밖에도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전국 곳곳의 사업회에서 제각각 열던 추모제를 하나의 행사로 묶어 열사들을 한자리에서 추모하는 일을 반대할 유가족은 없었다.

노동조합이 있는 대기업의 노동 열사와 대학생 열사들은 대부분 추모사업회가 꾸려져 있었지만, 노동조합도 없는 중소규모 사업장 출신 열사들은 사업회도 없었고 추모 행사도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기는 이제야 소외된 열사들에게 마음의 빚을 미력하나마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년 3월21일 유가협을 중심으로 각 사업회의 일꾼들이 모여 ‘합동추모제를 위한 추모사업회 연대회의’(추사연대)를 만들었다. 연대회의 의장은 전국연합 의장이 겸했다. 유가협은 합동추모제를 준비하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추모사업회 및 기념사업회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사업회 일꾼들이 한울삶에 모이면서 유가협과 사업회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졌다.

추사연대는 합동추모제 준비의 하나로 열사들의 유서와 약력을 담은 자료집을 간행하기로 했다. 각 사업회 실무자들은 한울삶에 모여 토론을 하고 사진과 자료를 모으며 책을 완성했다. 자료집 간행 작업은 박래군과 정미경이 주도했다. 자료가 없는 열사는 직접 유가족과 지인들을 인터뷰하며 약력을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전체 사업회 공저로 간행된 책이 <끝내 살리라-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이다. 유가협은 이 책을 간행한 이후 열사들이 매해 늘어나면서 몇 차례 증보판을 발행했다.

‘제1회 합동추모제’를 앞두고 박정기는 무대에 전시할 영정사진을 제작했다. 한울삶 영정 외에 모든 열사들의 사진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유가협의 아버지들과 함께 직접 영정을 표구했다. 추모사업회가 없는 열사들 중 더러 사진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의문사 1호’인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사진은 직접 유가족을 수소문해 확보할 수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한 사진은 액자 안에 열사의 이름만 적어두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합동추모제를 하루 앞둔 6월9일 유가족들은 민미련(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에서 제작한 걸개그림과 자재를 대형 트럭에 싣고 성균관대 근처에서 대기하며 교내에 진입할 작전을 짜고 있었다. 원래 추모제는 연세대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정부에서 연세대를 원천봉쇄하자 시민·학생들은 다음 장소인 성균관대로 이동했다. 이날 저녁 시민·학생들을 따라 성공적으로 트럭이 교내 금잔디광장에 진입했다. 시민들은 6·10 항쟁 계승 기념집회를 열고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박정기는 박래군·박채영과 함께 무대설치작업 전반을 지휘했다. 유가협의 아버지들, 전진상 노래모임 회원들, 학생들이 무대 설치를 도왔다. 그날따라 내내 강풍이 불어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이 빚어졌다. 작업 인원은 많았지만 모두 처음 하는 일이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머니들은 나무와 나무 사이 기다란 줄을 연결한 뒤 열사들의 사진을 걸었다. 강풍에 사진들이 자꾸 떨어져나가 몇번이나 다시 걸어야 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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