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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길을찾아서] 장일순 선생이 친 ‘난’ 보며 종철 눈물 떠올려 / 박정기

등록 2012-03-15 21:31

1989년 3월31일부터 열흘 동안 열린 유가협의 만남의 집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 때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희사한 5개의 난 작품 가운데 하나. 강원도 원주로 찾아간 이소선 회장과 박정기 부회장은 무위당이 이 작품을 그리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특별한 감동을 느꼈다.
1989년 3월31일부터 열흘 동안 열린 유가협의 만남의 집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 때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희사한 5개의 난 작품 가운데 하나. 강원도 원주로 찾아간 이소선 회장과 박정기 부회장은 무위당이 이 작품을 그리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특별한 감동을 느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72
1988년 여름 부산~광주~전주를 돌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박정기는 전국 곳곳의 화가와 서예가들에게 유가협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서화전에 참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예술가를 선정하는 일은 서울 을지로에서 ‘길벗화랑’을 운영하는 김재선과 임원태가 맡았다.

박정기는 작가들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농성을 멈추고 전국 각지로 달려갔다. 그가 찾아가면 열이면 아홉, 작품을 희사했다. 처음엔 집 한 채 얻을 돈을 어떻게 구하나 앞이 막막했지만, 사람들이 하나둘 함께하며 조금씩 길이 보였다. 소장하고 있는 고가의 작품을 선뜻 내주는 분도 있었다. 서화전 홍보를 위해 <한겨레>에 실은 광고를 보고 시민들이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 귀한 그림이 몇 점 있는데 기증하고 싶습니다.”

더러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도 있었다. 야당 총재인 김대중과 김영삼도 서예작품을 보내주었다.

장일순과 임창순 등 원로들에게는 이소선·박채영과 함께 직접 방문해 작품을 받았다. 원주로 찾아간 무위당 장일순은 서화전 계획을 듣고는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벼루와 먹을 꺼내 난을 쳤다.

박정기는 붓을 따라 완성되는 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위에 이슬이 맺혔다. 난의 눈물 같았다. 작품이 완성된 뒤 다시 보니 사람 얼굴과 흡사했다. 눈물을 흘리는 형상이었다. 어떤 얼굴이 작품을 감상하는 이를 지켜보는 듯했다. 바라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난이었다. 묘한 작품이었다. 박정기는 아들 철이가 늘 자신을 지켜보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소선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장일순이 난을 치는 동안 무슨 연유에선지 이소선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무위당은 다섯 점의 난 작품을 신문지에 말아 건네주며 말했다.

“원하는 일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작품이 필요하면 또 찾아오십시오.”

서울대의 어느 교수를 찾아갔을 땐 곤혹스러운 일도 겪었다. 작품 후원을 부탁하자 교수가 말했다.

“제 작품은 아무리 작아도 400만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제가 박종철이 죽은 거하고 무슨 연관이 있나요? 그 아이가 죽었으면 죽었지, 왜 이렇게 와서 날 괴롭히세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화가였지만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세상에 알려진 이들의 인품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이때만큼 절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박정기는 수시로 간사장 김승균을 만나 점검하고 의논하며 서화전을 준비했다. 그는 전국을 돌며 모은 작품을 인사동에서 표구했다. 그동안 수집한 작품이 모두 200여점이었다. 탈은 갈촌, 도자기는 고현, 서양화는 박상선, 동양화는 고운·무연·희재·백우·수안·지선 스님, 서예는 석전·강암·쇠귀 등이 작품을 희사했다. 익명을 원하는 어떤 이는 해강·의재·월전·장우성 등 대가들의 값나가는 작품을 내놓았다. 박정기는 작품을 보내준 작가들의 명단을 지금까지 보관해 고마움을 되새기고 있다.

원래 서화전을 열려던 장소는 조선일보사 미술관이었다. 김승균의 선배인 <조선일보>의 허술이 무료로 대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미술관에서 도록도 제작해주고 소장한 작품도 지원하기로 했다. 전시 작품 일부는 구입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배은심에 대한 ‘최루탄 화해’ 왜곡보도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유가협은 왜곡보도를 일삼는 언론사의 도움으로 ‘만남의 집’을 만들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른 장소를 대관하려면 적잖은 대관비가 필요했다. 전시회 수익이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었다. 안내문과 초청장도 다시 제작해야 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박정기는 미술관을 대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시 일정에 맞추려니 장소를 잡기가 여의치 않았다. 서화전 1주일을 앞두고 극적으로 서울 경운동의 아랍미술관을 대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3월25일 문익환 목사의 방북 소식이 들어왔다. 박정기는 깜짝 놀랐다. 북한 땅을 직접 찾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화전 준비보다도 문 목사에 대한 걱정으로 내내 마음을 졸였다.

3월31일, 8개월가량의 준비 끝에 서화전의 막이 올랐다. 첫날부터 전시장은 인산인해였다. 전국의 유가족 90여명이 찾아와 일손을 보탰다. 밥값을 아끼기 위해 전시장에서 직접 밥을 해 먹었다. 미술관에서 밥을 해 먹는 이들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들은 작품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기도 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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