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대우중공업을 비롯한 경남 창원공단 노동자들이 대규모 연쇄 파업투쟁에 들어가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일하던 정경식 열사는 그해 6월 노조 결성을 주도하다 실종돼 의문사했다.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63
195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정경식은 84년부터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일하다 86년께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주노조 결성을 준비하던 87년 5월26일 대의원 간접선거로 치르는 노동조합 지부장 선거에서 정경식이 도운 후보가 회사 쪽에서 민 후보에게 아까운 차이로 패했다. 정경식은 회사 쪽에서 대의원을 매수한 의혹을 따지다 상대 후보를 지지한 이아무개와 다퉜다. 그 뒤 6월8일, 이아무개가 전화를 걸어 정경식을 기숙사로 불렀다. 그를 만나러 나간 이후 정경식은 실종됐다.
어머니 김을선은 아들을 찾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회사와 경찰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직접 인부를 구해 야산을 수색하고 진정서를 넣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실종 9개월 만인 88년 3월2일, 경찰은 창원의 불모산에서 산불 진화작업 도중 정경식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미 주검은 유골만 남아 있었다. 경찰은 수사 1주일 만에 자살로 발표했다. 타살에 혐의를 둔 수사는 일절 없었다.
유골과 함께 발견된 작업복과 회사 출입증이 9개월간 야산에 방치된 것으로 보기에는 전혀 퇴색하지 않고 너무나 깨끗했다. 수사 발표 내용에도 자살로 믿을 만한 근거는 없었다. 김을선은 그때부터 더 큰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치열하고 눈물겨운 노력은 박정기의 눈시울을 적시게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88년 12월7일 유가족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창원 시내에 들어서자 김을선이 합류했다. 차에 탄 그는 얼굴에 근심을 띠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정문 앞에 딱 가면 사람들이 막을 낀데 우짜면 좋겠습니까?”
“어마이, 그까짓 거 내 하는 대로 가마 있으이소. 질만 갈쳐주면 방법을 찾아보겠심더.”
정문이 가까워지자 기사는 속도를 높이고 핸들을 꺾었다. 정문을 지키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 길을 피했다. 차는 그대로 정문 안으로 진입했다. 유가족들은 차에서 내려 마당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박정기와 이소선, 김을선은 공장 안에 들어가 정경식을 마지막으로 만난 이아무개를 찾았다.
공장장과 회사 직원들이 만류했지만 이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김을선은 회사 창고에서 일하고 있던 이아무개를 발견하고 쫓아가 멱살을 잡았다.
“야 이눔아, 우리 식구들(유가족들)이 왔다. 니가 경식이를 쥑있지 않나? 바른 말 하래이.” 김을선을 그의 뺨을 때리고 목을 비틀어 끌고 나왔다. 그는 키도 크고 완력이 센 사람이었지만 속수무책으로 끌려 나왔다. 김을선은 박정기와 이소선 앞에 그를 데려다 놓았다. 이소선이 말했다. “여기 앉아 보래이.”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었다. 박정기와 이소선이 추궁했다. “니가 경식일 안 쥑였나?” “니가 쥑인 게 확실 안 하나?” 그는 사색이 된 채 벌벌 떨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박정기는 공장에서 나와 유가족들에게 말했다. “표정을 보이 그놈아가 딱 범인이다.” 유가족들은 정문 앞으로 장소를 옮겨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재현(정경식의 아버지)이 목발을 짚고 경비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경비실 앞에서 목발을 쳐들더니 힘껏 내리쳤다. 경비실 유리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그는 다시 목발을 들어 휘둘렀다. 창문이 부서지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박정기와 유가족들의 눈과 귀는 오로지 그를 향해 있었다. 전경들은 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엔 몇 걸음을 걷더니 목발을 다시 높이 쳐들었다. 온 힘이 실린 목발에 유리창이 박살났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분노와 설움이 목발 끝에 실려 있었다. 그는 휘청대며 쓰러졌다. 집회를 마친 유가족들은 버스를 타고 마산의 진동에 있는 김을선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 김을선이 유가족들을 아들이 있는 아래채로 이끌었다. 그는 “죽음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헛간에 유골을 보관하고 있었다. 매일 그 앞에 향불을 피우고 아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생선 장사를 하던 김을선은 아들이 보고 싶으면 일을 접고 헛간으로 달려갔고, 회사에 쫓아가 항의했다. 아침저녁으로 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경식아, 오늘 내 고기 팔러 간다. 집 잘 봐라.”
“경식아, 고기 팔고 왔다. 뭐하고 지냈나?”
헛간 앞에 선 유가족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문을 열자 농기구들이 널브러져 있고, 어둠 속 한구석에 사과 상자가 보였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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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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