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침묵의 카르텔 깨자
교감 “증거 없으면 안된다” 거부 어릴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온 ㄱ군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09년 초부터 같은 반 친구들한테서 폭행과 언어폭력 등을 동반한 왕따를 당했다. 10월이 되어서야 ㄱ군의 어머니 박영희(가명)씨가 용기를 내어 학교에 해결을 요구했지만, 교사들은 문제를 덮기에 바빴다. 박씨는 학교 쪽과의 논의 과정에서, 가해 학생들이 ㄱ군에게 직접 공개사과를 하도록 하는 것이 왕따가 나쁜 행동임을 깨닫게 할 수 있는 교육적인 조처라고 주장했다. 실제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자료를 보면, 학교폭력을 저지르다 적발된 학생 가운데 최근 1년 동안 가해 행동을 하지 않은 학생들의 67%는 그 이유로 ‘스스로 나쁜 행동임을 알게 되어서’를 꼽았다. 그러나 학교는 박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가해 학생들은 왕따를 시킨 것이 왜 나쁜 일인지 반성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이들은 같은 중학교에 배정된 ㄱ군을 다시 괴롭혔다. 왕따를 비롯한 학교폭력 사건이 근절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처럼 대부분의 학교에서 침묵과 은폐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ㄱ군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교장 등 관리자들과 담임교사, 가해 학생 부모들이 ㄱ군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은폐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재구성해 봤다. 피해자 부모 사과 요구에
교장 “벌주는 기관 아냐”
폭력사건 쉬쉬에만 급급
가해학생 상담도 안해 ■ 교장과 교감 등 학교 관리자 이들이 보호해준 사람은 피해를 본 ㄱ군이 아닌 가해 학생들이었다. 10월29일 ㄱ군의 부모가 처음으로 교장을 만나 가해 학생의 공개사과와 각서를 요구하자, 교장은 “학교는 교육기관이지 벌주는 기관이 아니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감은 “아이들을 불러 반성문을 쓰도록 지도했다”고 말했지만 반성문을 ㄱ군이나 학부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교장과 교감은 ㄱ군을 괴롭힌 아이들을 ‘가해 학생’이라고 일컫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가해 학생’”이라고 했을 뿐이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자치위)를 열어달라는 어머니 박씨의 요구에 대해 교감은 “가해자의 사실 인정 등 증거자료가 없으면 열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은 피해 학생이나 보호자가 요청할 경우 자치위를 소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급교체 등 처벌을 요구하는 박씨에게 교감은 “그럴 경우 애들이 보복할 생각만 한다”며 겁을 주기도 했다. 학교는 폭력 사건이 공론화되는 것을 마뜩지 않아 했다. 학교는 가해 학생이 아닌 ㄱ군에 대한 상담만을 진행했다. 교감은 박씨에게 “ㄱ군 한 명도 소중하지만 다른 학생도 소중하다”며 가해 학생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ㄱ군은 학교폭력 피해 학생이 아닌 학교 부적응 학생이 됐고, 왕따를 당한 원인이 ㄱ군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6학년 학생부장을 맡은 교사는 “ㄱ군을 융화시키는 게 해결책이지 엄마가 감정적으로 나서면 안 된다”며 박씨를 ‘별난 엄마’로 몰아갔다. 피해자가 원인 제공 판단
교사조차 무시하기 일쑤
“귀찮아” “성적관리 먼저”
“해결 너무 어려워” 외면
■ 담임교사 박씨가 ㄱ군 친구들의 왕따 가해 사실을 녹취한 자료를 내놓자 담임교사는 “녹음은 불법이고 범죄”라며 믿어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우울증을 앓아 온 ㄱ군은 늘 왕따의 표적이 돼 왔고, 6학년 때도 학기 초부터 친구들이 던진 돌을 맞는 등의 괴롭힘을 당했지만 담임교사는 이런 사실을 알려오지 않았다. 박씨는 “어느 날 학교에 갔더니 수업시간인데도 애가 안 보이더라. 가해 학생들이 무서워서 수업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교사가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전에 ㄱ군을 맡았던 담임교사들은 대개 왕따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학년 담임교사는 “요즘 애들은 장난이 너무 심해서 그런 거다. 어머니가 참으라”고만 했다. 합창반을 지도했던 5학년 담임교사는 음정과 박자를 못 맞춘다며 학급 전체 학생이 참여하는 합창반에서 ㄱ군을 제외하기도 했다. 교사가 왕따에 ‘가담’한 셈이다. 결국 ㄱ군은 5학년 때 병원에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판정까지 받았다. 학교폭력에 대한 교사들의 외면은 비단 이 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귀찮아서” 학교폭력 사건에 눈과 귀를 닫는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학교폭력 문제는 선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해결하는 과정이 매우 어렵고, 엄청난 애정과 노동이 필요하다”며 “내가 맡은 업무가 있고 요즘은 애들 성적 관리도 중요한데, 학교폭력 문제에 에너지를 쏟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경욱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따돌림사회연구모임 회장(서울 단국대부속고 교사)은 “학교폭력은 성폭력과 마찬가지로 ‘당할 만하니까 당했다’는 가해자 중심의 논리가 지배하기 쉽다”며 “교사들조차도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해 학생들의 처지는 무심한 담임교사보다 보건교사나 상담교사의 눈에 잘 띄지만, 담임교사는 이들이 피해 사실을 알고 해결에 나서는 것을 막곤 한다.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이사장은 “다쳤다며 보건실에 찾아온 아이들을 치료하다 보면 학교폭력으로 피해를 봤다는 것을 알게 된다”며 “하지만 담임교사가 외부에서 자기 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해 피해 학생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가해자 부모 되레 큰소리
공개사과 없이 사건 무마
면죄부 던져줘 더 큰 피해
급우 증언기피로 소송도 져 ■ 가해 학생 부모 박씨가 가해 학생 부모 두 명에게 연락해 자녀들의 가해 사실을 알리고 학교에서 만나자고 하자, 그중 한 명은 “우리 애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불쾌해했다. 또다른 가해 학생 부모는 박씨를 집으로 불러 “우리 애가 시를 쓴다”며 “위로 누나밖에 없어서 마음이 여리고 약한데 그럴 리가 없다”고 가해 사실을 부인했다. 초등학교 때 가해 학생과 학부모의 공개사과 없이 학교폭력 사건이 무마되자, 중학교에 진학한 뒤 재발했다. 같은 중학교에 배정된 가해 학생은 다른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ㄱ군의 뒤통수를 때리고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전교 왕따’가 된 ㄱ군의 옷에는 늘 누군가에게 밟힌 듯한 발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박씨가 이를 문제 삼자 그 학생의 부모가 전화를 해와 “그 집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애를 괴롭히느냐”며 되레 화를 냈다. 가해 학생 부모는 자녀와 마찬가지로 ‘강자’인 경우가 많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피해 학생 부모는 피해 사실이 드러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반면 가해 학생 부모는 ‘문제가 있으니까 당했겠지’라며 교장실에서 큰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며 “부모의 이런 태도가 가해 학생에게 ‘나는 잘못이 없구나’라는 인식을 강화시켜, 그 뒤 더 심한 가해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반장처럼 학급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는 모범생들이 가해를 주도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부모들이‘그럴 리가 없다’며 자녀의 가해를 묵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ㄱ군을 괴롭힌 가해 학생 가운데에도 반장과 전교 부회장이 포함돼 있었다. 피해 학생 부모가 증거를 수집할 때 반 친구들의 증언이 필수적이지만 학부모들은 자녀의 입을 막는 경우가 많다. 2005년 왕따 가해 학생에게 맞아 숨진 이광용군의 큰아버지 이재현 학교폭력피해자가족연대 대표는 “학교폭력 사건은 급우들이 증언만 해주면 거의 100% 해결되는데 학부모들이 앞장서서 막는 바람에 고소를 하더라도 열에 아홉은 피해 학생 가족이 지는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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