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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정답 ‘찍는’ 로봇서 ‘베끼는’ 로봇으로 진화?

등록 2010-03-14 16:30수정 2010-03-14 16:31

서술형 시험 ‘모의테스트’ 해보니
서울교육청 초등까지 시험 확대, 반영비율도 높여
학생·학부모들 혼란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채점 공정성 논란으로 교과서 암기 수준에 그쳐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문을 읽고, 표의 문자에서 표음 문자로 발전하게 된 이유를 100자 안팎으로 써보라”는 국어 문제. 연필을 한참 굴리며 고민하던 은평구 ㅈ중 ㄱ양이 겨우 한 문장 적었다. “기본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각 문자의 의미를 외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교사가 채점기준표에 따라 채점해본 결과, 이 서술형 문제에서 ㄱ양은 2점을 받았다. ‘불편함’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긴 했지만 채점기준표에서 원하는 글자수를 채우지 못했고, 예시답안과 덜 유사한 답안인 탓이었다. 학교에서 서술형 시험을 치러보긴 했지만 이 서술형 문제는 그간 ㄱ양이 풀어본 문제와는 전혀 달랐다. “100자 이내로 쓰라고 하는 건 처음 봤어요. 근데 시험 볼 때 원고지를 주나요?”

<함께하는 교육>은 지난 3월5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 사는 중학생 59명, 고등학생 7명 등 66명을 대상으로 서울시교육청에서 발표한 ‘창의성 계발을 위한 평가 개선 기본 계획’(이하 ‘평가 개선 계획’)의 예시문항으로 모의테스트를 해봤다. 교육청에서 낸 채점기준에 따라 만점인 5점을 맞은 학생은 11명, 0점을 맞은 학생은 14명이었다. 원고지를 하나도 채우지 못하고 백지를 낸 학생도 3명 있었다.

이런 서술형 시험은 학생들에게 곧 다가올 ‘현실’이다. 지난 2월23일 나온 서울시교육청 발표를 보면 서울시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올해 중간고사부터 이런 서술형 문제를, 수행평가에선 논술형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서술형’이란 말을 낯설어하진 않았지만 막상 시험을 치러본 학생들은 ‘서술형’의 개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미 2007년도부터 서울시교육청은 중·고교에서 주요 과목 내신시험 문항 가운데 50%를 서술형을 포함한 서답형으로 출제하도록 했지만 많은 학교들이 ㄱ양의 학교처럼 선택형, 단답형, 완성형 위주로 문제를 출제하면서 이것이 서술형 문제처럼 인식이 굳어진 탓이다. 하지만 2010년부턴 단답형·완성형을 제외한 순수 서술형 문항의 반영 비율이 높아진다. 당장 중간고사부터 시작할 계획이다.

소식을 들은 학부모들은 혼란스럽다. 아직 시험을 치러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막연한 불안도 감돈다.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부모는 “아들이 중3인데 남자 아이라 그런지 글을 잘 못 쓴다”며 “준비도 안 된 아이라 과외를 더 시켜야 하나 걱정이다”라고 했다. 양천구 목동의 한 학부모는 “서술형 몇 줄 쓰는 걸로 창의력이 향상되는지 의문”이라며 “목동엔 서술형 학원이 벌써부터 나와 있었는데 사교육이 더 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생들은 서술형에 대한 개념의 혼란을 겪고, 교사들은 평가의 객관성을 여전히 걱정한다. 하지만 곧 다가오는 중간고사부터 서울시 지역 학생들은 서술형 시험을 치러야 한다. 사진은 모의테스트를 한 4명의 시험지와 점수. 5점이 만점이다.
학생들은 서술형에 대한 개념의 혼란을 겪고, 교사들은 평가의 객관성을 여전히 걱정한다. 하지만 곧 다가오는 중간고사부터 서울시 지역 학생들은 서술형 시험을 치러야 한다. 사진은 모의테스트를 한 4명의 시험지와 점수. 5점이 만점이다.
학생들의 걱정은 시험 준비의 어려움에 그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서술형이 채점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울 거라는 문제제기도 여러 학생들 입에서 나오고 있다. 2005년부터 시행된 이 제도가 지금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도 여기 있다. “서술형 시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마포구 ㄱ고교 2학년 이군은 서술형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자는 뜻에서 나온 거잖아요. 개념은 잘 알죠. 좋은 취지잖아요. 근데 달라질 건 없다고 봐요. 진짜 서술형을 내면 평가 때문에 난리가 날 걸요.” 시험 평가에는 객관적 기준이 분명히 들어가야 하는데 서술형은 점수차를 납득시킬 상세한 기준을 내놓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다. 광진구 보성고 한창호 교사는 “특히 ‘국어과’에선 교사의 직관이 작용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며 “아무리 채점기준을 명확하게 잡아도 채점기준표로 해결하지 못하는 답안들이 분명히 나온다”고 했다. 구로구 ㄱ중학교 ㅇ교사는 “복수채점 등을 하지만 교사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대립하는 사례도 많고, 결국 복수채점을 하더라도 확인 사인 정도로만 넘어가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도 했다. 서술형 시험 체제에선 평가에 불만을 품고 찾아오는 학생들도 많다. 종로구 ㄱ중학교 ㅊ교사는 “중학교는 그나마 덜하지만 내신 1점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고등학교에서 서술형 시험이 제대로 실시된다면 평가 기준 때문에 큰 난리가 날 것”이라고 했다. “주입식에서 탈피하자는 취지 자체는 좋지만 내신 1점 차이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우리나라 입시 제도 현실에선 쉽지 않은 시험이죠.”

채점의 공정성 논란 때문에 문제와 답이 도식화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객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채점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나오면서 교과서에 나온 지문을 그대로 적어야 정답으로 인정하는 일도 있다. 보성고 김종석군은 “특히 영어 과목은 그런 일이 정말 많다”고 했다. “유치할 정도로 작은 부분에서 틀린 걸 잡아내기도 하고, 같은 의미인데 표현은 다른 문장을 써도 틀렸다고 하죠. 이의제기를 하면 선생님은 교과서가 원칙이라고 하세요. 아마 서술형이 강화되면 교과서 문장 토씨 하나까지 외워야 할지도 몰라요.(웃음)” 신목중 1학년에 재학중인 한 학생의 학부모는 “직접 겪은 일”도 털어놨다. “영어에서 같은 뜻인데 다른 표현을 적었다고 틀렸다고 하셨길래 선생님께 찾아갔더니 저한테 얘기하지 마시고, 교과서를 보라고 하시더군요. 영어의 경우는 이런 일이 정말 다반사일걸요.”

이런 상황에서 제도의 취지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결국 본말이 전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애초 서술형 시험은 창의력, 표현력, 문제해결력을 높이자는 목표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학부모는 “수업 시간에 배운 것, 교과서에 나온 것 중에서 문제를 내는 건 좋지만 이렇게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해서 교과서를 그대로 베끼는 수준까지 간다면 이 서술형 시험이 객관식 시험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냐”고 했다.

<교육 측정의 이론과 실제>를 쓴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백순근 교수는 “채점 평가 부분이 흔히 우려하는 지점이긴 한데 그렇다고 계속해서 이 부분을 외면할 순 없다. 믿을 만한 평가를 하느냐 못하느냐는 교사 전문성과도 연결이 되고, 공교육의 질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다. ‘객관적인’ 게 아니라 ‘전문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은 “곧 평가 예시문항 자료집을 배포하고, 4월 안에 서술형 관련 교원 연수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교사들의 평가 전문성을 키우게 하겠다”고 했다. 서술형 시험 논란이 수위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중간고사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김청연 기자 carax3@hanedu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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