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교에 전시된 2010년 새 교과서.
[커버스토리]
서울 ㄱ중학교 가사실은 요즘 교사 전용 도서관이다. 가사실에 진열된 책은 2010학년도 교과서다. 모두 23과목에 321종의 교과서가 진열돼 있다. 사회 교과서는 15종, 영어 교과서는 19종, 음악 교과서도 16종이나 나와 있다. 2007년에 발표된 제7차 교육과정 개정안에 따른 새 교과서들이다. 교사들은 검정을 통과한 여러 종류의 교과서들 가운데 한 종을 고르게 된다. 교사들이 틈날 때마다 들러 교과서를 ‘독서’하는 것도 좀더 좋은 교과서를 선택하기 위해서다.
23과목 321종 “언제 다 봐서 채택하나”
우리나라 교과서는 민간 출판사가 교과서를 개발하고 국가가 검정해 발행하는 검정제와 국가가 교과서 편찬의 전 과정을 책임지는 국정제로 운영된다. 초등학교 주요교과, 중학교 생활외국어, 고등학교 생활외국어와 농업·공업·상업 등 전문교과는 국정도서로, 이를 뺀 거의 모든 교과서는 검정도서다.
국어를 가르치는 ㄱ중 정아무개 교사한테는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마냥 낯설다. 교직에 몸담은 지 10년째, 국어 교과서는 늘 한 권이었다. 국어는 1954년 제1차 교육과정 시기부터 반세기 넘게 줄곧 ‘국정’이었다. 도덕 교사들도 올해 처음 교과서를 선택한다. 2007년 옛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 제도 개선 방안’에서 다양한 교과서 개발을 위해 중·고등학교 국어, 도덕, 역사 교과서를 검정으로 전환했다.
교사가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건 학생과 학부모가 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다. 진영효 전국도덕교사모임 회장은 “이제 하나의 교과서로 모든 아이들이 같은 지식을 암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중요하다”며 “내용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학습활동이나 수업 보조 자료들이 다양해지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고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성호 전국역사교사모임 사무국장은 “학생들이나 학교의 처지에 따라 적합한 교과서가 다를 수 있는데 국정 교과서로는 그런 차이를 반영한 교육을 하기가 힘들었다”며 “전문계고교·일반계고교, 도시 지역·농산어촌 지역 등 각각의 특성을 고려한 교과서를 선택할 수 있게 된 점에서 분명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교와 학생의 처지를 고려해 세심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다양한 교육을 추구하는 검정제의 취지를 살리는 대전제다. 그러나 지금의 교사들에게 교과서를 선택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좋은 교과서’를 선택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책 정보 부족해 “큰 학교서 고르는 대로” 우선 선택을 위해 고심할 시간이 없다. 검토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공식적으로 9월5일~10월5일 한달이다. 그 가운데 절반은 학교 안의 행정 절차를 밟는 데 쓰인다. 서울 ㅍ중 이아무개 교사는 “제일 처음 교과서 선정 담당 부서에서 3일을 줬다”며 “지금이 대대적으로 교과서를 선정하는 시기라 담당 부서에서 편의적으로 조정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거나 교육청에 보고할 시한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는 일도 많다. 마음이 급한 사이 교과서 선택의 기준은 왜곡된다. 경북의 김아무개 교사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고려하면 많은 학교가 채택하는 교과서로 정하는 게 시험 대비에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교사도 있다”며 “우리 학교의 특성을 살피기보다 학생 수가 많은 학교의 선택을 좇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의 한 교사는 “이쪽 학교들은 이 지역의 사대 출신 교수, 교사들이 집필한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마음을 정한 분위기”라고 전했다. 타당한 기준을 마련하려고 해도 그와 관련한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교사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교과서와 교과서 검정 통과 이유, 수정·보완 사항 등 교과부가 제한한 몇 가지뿐이다. 게다가 교과서 출판사들의 지나친 경쟁에서 비롯한 채택 비리를 없애고자 올해 교과부는 그 어느 때보다 교과서 선정 과정과 방식을 통제하고 있다. 검정 통과위해 보수화 “내용도 고만고만” 더구나 현재 교과부는 교과별 연구모임에서 교과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금지해 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교과서 선정과 관련해 지역 교육청이 학교에 발송한 공문을 보면 “일부 교과별 모임에서 인터넷이나 기타 수단을 통하여 출판사별 교과내용 분석표 등을 인터넷상에 올려 특정 검정도서를 간접 홍보”하는 행위를 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 교과모임 관계자는 “교과서를 미리 받아보고 검토한 뒤에 분석 내용을 회지에 실었지만 유의사항을 고려하느라 정작 교사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언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북의 김아무개 교사는 “교사들은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로 바뀌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교과서를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으며 교육청 차원의 공식 연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력을 앞세운 거대 출판사들의 입김은 여전히 세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몇몇 유력 출판사들이 언론에 1500만~2000만원을 주고 기업 최고경영자(CEO) 인터뷰나 이미지 광고를 실은 것 때문에 교과부의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가 돈다”고 말했다. 또다른 출판사 관계자는 “2000년 제7차 교육과정 교과서 검정 때는 한 교과에 8~10종이 통과돼 교사들이 충분히 검토할 여력이 있었다”며 “그때는 내용만으로 평가받아도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10종이 훌쩍 넘고 유력 출판사들의 영향력은 그대로인 상태여서 교사들이 내용을 꼼꼼히 따져 선택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교과서를 ‘독파’하는 것 말고는 없는 상황이지만, 교과서는 충분한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검정 기준을 충족하느라 거의 모든 교과서가 ‘고만고만’해진 탓이다. 안용순 전국국어교사모임 대표는 “위험을 감수하고 교과서별로 비교·분석을 하고 싶어도 사실 다 대동소이해서 어느 하나를 추천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지금은 수준별, 지역별로 차별화한 교과서가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별반 다르지도 않은 교과서를 23종이나 발행하는 것은 자원 낭비”라고 말했다. 조자룡 전국영어교사모임 대표는 “한 지문에도 다양한 영어 학습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 교과서의 기술적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면서도 “교육과정에 지문의 주제가 세세하게 규정돼 있다 보니 교육과정에 충실하기만 한 교과서가 학생들의 현실과 자꾸 동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역·수준에 맞는 교과서 선택 불가능해 최지현 서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진짜 문제는 교육과정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 검정 체제가 그걸 막는다는 점”이라며 “교육과정이 나빠도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검정을 통과할지가 최우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집필자들이 교육과정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책 정보 부족해 “큰 학교서 고르는 대로” 우선 선택을 위해 고심할 시간이 없다. 검토를 할 수 있는 시간은 공식적으로 9월5일~10월5일 한달이다. 그 가운데 절반은 학교 안의 행정 절차를 밟는 데 쓰인다. 서울 ㅍ중 이아무개 교사는 “제일 처음 교과서 선정 담당 부서에서 3일을 줬다”며 “지금이 대대적으로 교과서를 선정하는 시기라 담당 부서에서 편의적으로 조정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치거나 교육청에 보고할 시한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는 일도 많다. 마음이 급한 사이 교과서 선택의 기준은 왜곡된다. 경북의 김아무개 교사는 “학업성취도 평가를 고려하면 많은 학교가 채택하는 교과서로 정하는 게 시험 대비에 유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교사도 있다”며 “우리 학교의 특성을 살피기보다 학생 수가 많은 학교의 선택을 좇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충남 공주의 한 교사는 “이쪽 학교들은 이 지역의 사대 출신 교수, 교사들이 집필한 교과서를 채택하려고 마음을 정한 분위기”라고 전했다. 타당한 기준을 마련하려고 해도 그와 관련한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것도 문제다. 교사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교과서와 교과서 검정 통과 이유, 수정·보완 사항 등 교과부가 제한한 몇 가지뿐이다. 게다가 교과서 출판사들의 지나친 경쟁에서 비롯한 채택 비리를 없애고자 올해 교과부는 그 어느 때보다 교과서 선정 과정과 방식을 통제하고 있다. 검정 통과위해 보수화 “내용도 고만고만” 더구나 현재 교과부는 교과별 연구모임에서 교과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금지해 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교과서 선정과 관련해 지역 교육청이 학교에 발송한 공문을 보면 “일부 교과별 모임에서 인터넷이나 기타 수단을 통하여 출판사별 교과내용 분석표 등을 인터넷상에 올려 특정 검정도서를 간접 홍보”하는 행위를 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한 교과모임 관계자는 “교과서를 미리 받아보고 검토한 뒤에 분석 내용을 회지에 실었지만 유의사항을 고려하느라 정작 교사들의 선택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언급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북의 김아무개 교사는 “교사들은 교과서가 검정 교과서로 바뀌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교과서를 골라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으며 교육청 차원의 공식 연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력을 앞세운 거대 출판사들의 입김은 여전히 세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몇몇 유력 출판사들이 언론에 1500만~2000만원을 주고 기업 최고경영자(CEO) 인터뷰나 이미지 광고를 실은 것 때문에 교과부의 경고를 받았다는 얘기가 돈다”고 말했다. 또다른 출판사 관계자는 “2000년 제7차 교육과정 교과서 검정 때는 한 교과에 8~10종이 통과돼 교사들이 충분히 검토할 여력이 있었다”며 “그때는 내용만으로 평가받아도 자신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과목에서 10종이 훌쩍 넘고 유력 출판사들의 영향력은 그대로인 상태여서 교사들이 내용을 꼼꼼히 따져 선택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교과서를 ‘독파’하는 것 말고는 없는 상황이지만, 교과서는 충분한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검정 기준을 충족하느라 거의 모든 교과서가 ‘고만고만’해진 탓이다. 안용순 전국국어교사모임 대표는 “위험을 감수하고 교과서별로 비교·분석을 하고 싶어도 사실 다 대동소이해서 어느 하나를 추천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지금은 수준별, 지역별로 차별화한 교과서가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별반 다르지도 않은 교과서를 23종이나 발행하는 것은 자원 낭비”라고 말했다. 조자룡 전국영어교사모임 대표는 “한 지문에도 다양한 영어 학습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나라 교과서의 기술적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라면서도 “교육과정에 지문의 주제가 세세하게 규정돼 있다 보니 교육과정에 충실하기만 한 교과서가 학생들의 현실과 자꾸 동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역·수준에 맞는 교과서 선택 불가능해 최지현 서원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진짜 문제는 교육과정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 검정 체제가 그걸 막는다는 점”이라며 “교육과정이 나빠도 좋은 교과서가 나올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검정을 통과할지가 최우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집필자들이 교육과정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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