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성장하는 사춘기, 10대는 ‘생각’도 성장하고 싶다. 그래서 토론에 빠진다. 사진은 지난 21일, 보인고 토론 동아리 ‘에센시아’가 ‘수월성 교육’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 김종수 기자 jongsoo@hani.co.kr
촛불…광우병…수능성적공개…
교실 밖에서 사회문제 ‘비틀기’
전국대회 해마다 참가자 급증
‘어른들식 감정싸움은 안합니다’
교실 밖에서 사회문제 ‘비틀기’
전국대회 해마다 참가자 급증
‘어른들식 감정싸움은 안합니다’
서울 보인고 2학년 김명래군과 채승재군은 극과 극이었다. 김군은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보면 “매사에 불만과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반대로 채군은 친구들한테서 “극좌” 또는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쪽이었다. 좁고 편협한 세계에 빠져 있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아집의 벽을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토론’ 덕분이었다.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 김군과 채군은 ‘촛불의 정당성’과 ‘광우병’에 대해 토론했다. 그 결과 김군은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모든 걸 다 말해주는 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채군은 “사회운동을 하시는 부모님과 상관없이 나만의 생각을 하게 됐다.” 그들은 함께 지난해 11월에 생긴 보인고 토론 동아리 ‘에센시아’에 1기로 가입했다.
토론의 매력에 빠지는 10대가 많다. 특히 머리가 굵어지는 고교생들한테서 두드러지는 모습이다. 고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규모의 토론대회에는 해마다 토론 마니아가 모여든다. 지난해 한 토론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김수림(경기여고3)양은 “토론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나의 생각을 깨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토론 동아리를 꾸리는 학생들도 많다. 부산시 교육청은 중고교 독서토론 동아리에 예산 지원을 하는데 2007년에 58팀이었던 것이 올해는 159팀으로 세 배가량 늘었다. 부산에 있는 310개 중고교 가운데 절반 정도에 독서토론 동아리가 있는 셈이다.
지난 20일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경기도 수원외고의 ‘국제회의실’에 25명이 둘러앉았다. 토론 동아리 ‘타둘’(TADOOL·Think And Debate Our Opinion Logically)의 학생들이었다. 타둘은 ‘우리 생각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토론하자’는 뜻이다.
“찬성 쪽 1번 타둘러 입론해 주세요.” 회의실 의장석에 앉은 사회자가 말하자 오른쪽에 나란히 앉은 네 명의 학생 가운데 첫번째 학생이 수능 성적 공개에 대한 찬성 의견을 말했다. 3분 동안의 입론이 끝나자 반대 쪽 1번 학생이 반대 의견을 밝혔다. 찬성과 반대쪽이 번갈아가며 입론과 반론, 재반론을 반복하는 세다(CEDA·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식 토론이다. 세다식 토론은 ‘교차조사식 토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상대 주장의 논리적 허점이나 근거를 찾아 묻는 식으로 토론이 진행된다.
이처럼 10대가 하는 토론에는 ‘대립’ 대신 ‘규칙’이 있다. 박영상(고2)군은 “우리한테 찬반은 중요하지 않다”며 “100분토론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자기 주장만 하고 감정싸움만 하다가 끝나는 일이 많은데 우리의 목적은 싸우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타둘의 학생들은 찬반 입장을 토론 시작 직전에 정한다. 토론을 위한 자료를 찾을 때 찬반 입장을 두루 살필 수밖에 없다. 기장을 맡고 있는 양의선(고2)양은 “자유토론을 하게 되면 같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제기될 수 있고 난상토론이 되기 쉽다”며 “토론의 규칙이 있어야 토론도 잘되고 토론을 통해 얻는 것도 많다”고 말했다. 토론하면 난상토론에 그치기 일쑤인 어른들을 반면교사로 삼은 셈이다.
사실 대다수의 토론 동아리가 토론의 규칙을 정하는 것은 토론대회 참가를 고려한 포석이기도 하다. 지난 2006년에 타둘을 만든 박수진(20)씨는 “동아리 토론의 규칙은 전국 규모의 토론대회에서 빌려 왔다”며 “수시모집의 자기소개서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이왕 하는 것 토론대회 준비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라고 말했다. 실제로 토론대회 참가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이 주최하는 ‘전국 고교생 토론대회’는 첫 회가 열렸던 2003년에 전국에서 131팀이 예선에 참여했는데 2008년 5회 대회 때는 253팀이 참여해 개최 5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5·18기념재단이 여는 ‘5·18 민중항쟁 정신 계승 전국 고교생 토론대회’도 50~60팀 정도가 참여하던 3년 전에 견줘 지난해 100여팀으로 늘었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 득이 되는 경력을 쌓는 것 말고도 토론이 주는 유익은 많다. 특히 학생들은 토론을 통해 자기주도력을 기른다. 지난해 11월 토론 동아리 ‘에센시아’를 만든 보인고 3학년 김수군은 “동아리를 유지하기 위한 벌점이나 경고 등 강제성 있는 규칙은 없다”며 “토론이 정말 좋아서 자발적으로 모였고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자료를 찾는 것까지 모두 스스로 알아서 한다”고 말했다. 에센시아는 학교 교육과정에 보장된 재량활동 시간에 토론 동아리 활동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해 올해부터 토요일 재량활동(C.A.) 시간에 동아리 모임을 한다. 교내 동아리 가운데 재량활동 시간에도 모임을 하는 건 에센시아가 유일하다. 최영주 보인고 교사는 “모임을 만들 때부터 교사들의 간섭과 개입을 사양한다고 분명히 밝히더라”며 “11월부터 지금까지 동아리 운영은 학생들이 스스로 해 왔다”고 말했다.
틀에 박힌 교실 수업에서 느끼기 힘든 ‘똑똑해진다’는 성취감 역시 토론의 매력이다. 수원외고 1학년 김지수양은 “얼마 전에 기술 발전과 개인의 자유에 관해 토론하면서 <멋진 신세계>를 읽었는데 깊은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할 때 인용을 하다 보면 내 사고가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인고 2학년 한승민군은 “여러 배경지식을 쌓다 보면 내 생각의 방식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게 내 생각을 수정하고 고치다 보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익히게 된다”고 말했다. 강치원 원탁토론 아카데미 교수(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암기-이해-응용-분석-종합-판단으로 이어지는 게 학습의 과정인데 교실 수업에서 분석-종합-판단을 하기는 힘들다”며 “토론이 뒤의 세 단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틀에 박힌 교실 수업에서 느끼기 힘든 ‘똑똑해진다’는 성취감 역시 토론의 매력이다. 수원외고 1학년 김지수양은 “얼마 전에 기술 발전과 개인의 자유에 관해 토론하면서 <멋진 신세계>를 읽었는데 깊은 생각을 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할 때 인용을 하다 보면 내 사고가 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인고 2학년 한승민군은 “여러 배경지식을 쌓다 보면 내 생각의 방식에 모순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게 내 생각을 수정하고 고치다 보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익히게 된다”고 말했다. 강치원 원탁토론 아카데미 교수(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암기-이해-응용-분석-종합-판단으로 이어지는 게 학습의 과정인데 교실 수업에서 분석-종합-판단을 하기는 힘들다”며 “토론이 뒤의 세 단계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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