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한 권의 책/ 그리고 끝이 없는 이야기
문학을 갈망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문학으로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그려내면서 오히려 슬픔을 이겨내고, 아픔을 그려내면서 차라리 아픔을 견디는 역설이야말로 문학에 담긴 은밀한 비밀이 아닐는지.
지금의 어린이들은 예전의 우리들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어두운 얼굴로 지내는 어린이들이 적지 않다. 한층 심해진 경제적인 격차와 문화적인 소외 속에서 숨죽이고 지내는 어린이들. 햇살이 눈부시게 환한 날일수록 그늘이 더 짙고 깊은 법이니까.
<그리고 끝이 없는 이야기>(노경실 글, 김호민 그림, 푸른숲)는 이런 현실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다. 그것은 가난과 소외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에까지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문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의미다.
9월의 끝자락에 걸린 일요일 오후, 명훈은 친구들과 함께 동네 선배인 동철에게 호출을 받는다. 중학교 중퇴생인 동철이가 내린 명령은 자기가 일하던 주유소의 돈을 털자는 것이다. 딱 한 번만 돈을 훔친 뒤, 나중에 부자가 되면 그걸 갚고 가난한 사람들도 돕자는 것이다. 동화에서는 곱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듣는다면 기절하고도 남을 얘기다.
출구가 보이지않는 그늘속 어린이
마음의 빛과 그림자 섬세히 묘사
이 아이들이 행동을 취할 날은 수요일 새벽, 불과 사흘도 안 남은 시간이다. 숱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명훈의 마음은 점차 계획에 가담하는 쪽으로 기울어간다. 사고로 다리를 잃고 난 뒤 삶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린 아버지에게 전동휠체어를 사드리고 싶어서이다. 아니, 그보다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뿌리치기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칫 이분법적 결론이나 상투적 교훈으로 미끄러질 수도 있는 이런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끌고 가는 힘은 명훈의 심리에 대한 애틋하고 절절한 묘사다. 여동생 은실이와 명훈이 나누는 대화도 잊혀질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아직 세상을 모를 것 같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어쩌면 그리도 행복과 사랑에 대한 소망이 간절하게 깃들어 있는지. 이를 시적인 상징 공간으로까지 압축해내는 솜씨가 놀랍다. 역시 어린이 문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성이다.
이야기는 점점 길이가 짧아지는 네 개의 장에 실려 정점을 향해 긴박하게 치닫는다. 그리고 마침내 수요일 새벽. 긴 밤을 꼬박 새운 명훈은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둥근 손잡이를 살짝 돌리기만 하면 무너지는 흙무더기 같은 세상 속으로 나간다. 문 앞에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엎어지고 포개진 가족의 신발들이 저마다 무슨 말을 쏟아내듯 입을 벌리고 있다. 명훈이가 끝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사건은 여기까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작품은 그래서 끝이 없는 이야기지만, 독자들의 가슴 속에서는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오석균/도서출판 산하 주간 bach1958@yahoo.co.kr
출구가 보이지않는 그늘속 어린이
마음의 빛과 그림자 섬세히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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