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교육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2022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검토 공청회’ 시작 전 객석에 있던 한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한민국은 자유 대한민국’이라며 소리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내가 월남전에서 수호한 자유 대한민국입니다!”
‘다시 건국정신으로’라고 적힌 흰색 겉옷을 입은 한 남성이 실내에서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자유 대한민국’을 외치자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너희가 보릿고개를 알아?”“(여기) 빨갱이들 다 고소할 거야!” 같은 고성이 울러 펴졌다.
30일 오후 3시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교육박물관 소강당에서 열린 ‘2022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검토 공청회’는 시작도 하기 전 이념 공세로 소란스러웠다. 120석 규모 객석은 공청회 시작 20분 전부터 역사교사, 중장년 시민으로 가득 찼다. 공청회장으로 향하는 출입문 앞에선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한 시민연대’ 소속 남성이 ‘교육부는 왜 (교육과정에서) 자유를 삭제하느냐’는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옆자리엔 ‘역사과 교육과정에 대한 부당한 개입을 중단해달라'는 손팻말을 든 역사교사가 있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현대사 서술을 놓고 되풀이된 이념 논쟁이 이날 공청회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30일 오후 ‘2022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검토 공청회’가 열린 한국교원대 교육박물관 입구 앞에서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한 시민연대’ 회원과 역사과 교육과정에 대한 부당한 개입 중단을 촉구하는 역사교사가 나란히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8월 말 2024년 초등학교 1·2학년을 시작으로 순차 적용되는 ‘2022 개정 교육과정 시안’이 공개된 직후부터 이어졌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진영에선 2025년부터 고등학생이 배우게 될 ‘2022 개정 한국사 교육과정 시안’에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민주주의 설명에서 ‘자유’가, 6·25전쟁에선 ‘남침’ 표현이 빠졌다고 문제 삼았다. 9월 19일 교육부는 국민참여소통채널을 통해 접수된 ‘여론 수렴’ 결과를 공개하며 “역사에 대한 국민 우려를 확인한 만큼 균형 잡힌 역사교육을 위해 꼭 배워야 할 내용이 충실히 반영될 수 있도록 보다 면밀히 수정·보완해달라”는 요청으로 연구진을 압박했다.
‘민주주의·대한민국 정부 수립’ 유지…‘남침’ 명시
이날 국민 여론을 검토해 수정 작업을 거쳐 공개된 ‘공청회 시안’을 보면 역사과 연구진은 ‘민주주의에 자유를 붙여 자유민주주의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 또는 건국으로 바꿔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유지하고, 역사적 사실을 명시해달라는 제안을 수용해
성취기준 적용 시 고려사항에 6·25 ‘남침’, ‘8·15 광복’ 표현을 담았다. 성취기준 해설에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의’, ‘독도 문제’가 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공청회에 참석한 한 남성은 “북한도 민주주의라고 하고 남한도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떤(자유) 민주주의인지 분명히 밝혀주지 않으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한다”며 큰소리로 항의했다.
연구진이 차례로 교육과정 시안 주요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선 ‘나쁜 짓 했냐 왜 이름을 못 밝히냐’, ‘범죄자냐, 신분부터 밝혀라’ 등 소속과 이름을 공개하라는 항의가 쏟아져 공청회가 잠시 지연되기도 했다. 교육부 설명을 종합하면,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5항에 따라 연구 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는 밝히지 않아도 된다. 교과 연구진 개인정보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배경이다.
이날 역사과 외에도 사회과·국어과·체육과 등 다른 과목 시안 공청회도 진행됐다. 2026년부터 초등학교 5·6학년이 배울 사회과 교육과정 시안에 ‘6·25 전쟁 원인과 과정’ 등의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는데 연구진은 이를 받아들여 성취기준 적용 시 고려사항에 6·25 전쟁 원인 등을 학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통합사회’ 과목 성취기준 해설에 ‘사회적 소수자’ 사례로 거론한 ‘성 소수자’를 예시에서 빼달라는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어과의 경우 2018년부터 교육 현장에 적용한 ‘한 학기 한권 읽기’ 개념이 시안에서 빠지자 국어 교사들을 중심으로 다시 포함해야 한다는 여론이 컸는데 ‘공청회 시안’엔 이러한 의견이 반영됐다.
연구진은 공청회에서 나온 의견과 각 교과목 공청회 뒤 5일 동안 ‘국민참여소통채널’으로 들어온 의견을 바탕으로 시안을 다시 수정·보완한다. 교육부는 “쟁점이 지속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교육과정 개정 관련 협의체, 교육과정심의회 등을 통해 조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교육부가 마련한 최종안은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로 넘어가 심의·의결 과정을 거쳐 올해 말 교육부 장관이 고시할 예정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시절 ‘친일·독재 미화’ 역사 국정교과서를 추진한 이배용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국가교육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시절인 2011년 8월 ‘민주주의’ 표현은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꾼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했다.
청주/글·사진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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