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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누구나 책을 쓰는 시대가 온다

등록 2021-12-27 16:34수정 2021-12-28 02:00

연재ㅣ강원국의 ‘공부하면 뭐 하니’
학창 시절, 새 학년이 되면 취미와 특기, 장래 희망을 써내라고 했습니다. 장래 희망은 초등학생 때 영화배우라고 썼다가 친구들이 놀린 다음부터 판검사라고 썼고, 특기는 예체능에 그다지 소질이 없어 글짓기라고 둘러댔지요. 문제는 취미였습니다. 취미랄 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독서라고 적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독서는 따로 있다. 어휘와 문장, 글의 구성을 유심히 보고 평소 내가 잘 쓰지 않는 단어나 문형을 발견하면 머리에 담아두자. 게티이미지뱅크
글을 잘 쓰기 위한 독서는 따로 있다. 어휘와 문장, 글의 구성을 유심히 보고 평소 내가 잘 쓰지 않는 단어나 문형을 발견하면 머리에 담아두자. 게티이미지뱅크

책과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중학생 때는 이모와 함께 살았는데, 시인이었던 이모부의 서재가 내 방이었습니다. 만권 정도 되는 책에 둘러싸여 자고 일어났습니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심심함을 달래는 수단은 책뿐이었습니다. 무료한 것보다는 독서가 나았지요. 이때 읽은 책이 ‘한국 단편소설 전집’입니다.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물레방아>, 오영수의 <갯마을>, 김유정의 <동백꽃>. 어찌나 야한지. 사춘기 중학생에게 신천지를 펼쳐 보여줬지요. 내가 설명이나 묘사, 논증하는 글은 잘 못 쓰지만 이야기는 잘 쓸 수 있는 힘이 이때 생기지 않았나 싶네요.

고등학생 때는 고모 집에서 살았습니다. 고모 집은 전주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는데, 살림집이 5층에 있어 드나들 때마다 1, 2층의 서점을 지나야 했습니다. 밤 11시 넘어 서점에 내려오면 나 혼자였습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조해일의 <겨울 여자>, 박범신의 <죽음보다 깊은 잠> 같은 장편소설에 푹 빠졌습니다. 나중에 연소자 관람 불가로 영화화된 작품들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았습니다. 목차를 보고 클라이맥스, 즉 ‘남녀상열지사’ 대목만 찾아 읽었지요. 찾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지금도 대형 서점에 가면 마음이 설레는 이유도 그때의 기억 때문인 듯합니다.

대학에 다닐 적엔 책을 사 모으는 병에 걸렸습니다.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버는 족족 책을 샀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역, 청계천 등지에 헌책방이 즐비했고, 그곳을 순례하며 책을 고르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할 데가 없었지요. 마침내 출판사 편집자로 직장생활의 끝을 마무리했고, 이후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책을 필두로 8년 동안 여섯 권의 책을 쓰면서 밥 먹고 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책 읽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읽는 만큼 잘 쓸 수 있으니까요. 내가 책을 읽는 까닭은 단 하나입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읽음으로써 얻는 이익이 분명해지면서 독서가 즐거워졌습니다.

가방에 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글쓰기, 말하기와 관련한 책들입니다. 사실 어떤 책도 이와 관련이 없을 수 없지요. 지금도 책을 다 읽진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궁금한 대목만 찾아 읽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는 책은 많지 않지요. 이미 알고 있거나 이전에 읽은 것과 중복되는 내용이 많습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거나 깨달음이 왔을 때는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한 독서는 따로 있습니다. 나는 첫째, 마음에 드는 책을 반복해 읽거나, 본받고 싶은 작가의 책을 모두 찾아 읽습니다. 그러면서 책의 저자나 작가의 문체를 배웁니다.

둘째, 한 꼭지 글을 읽으면 다음 꼭지로 넘어가기 전에 내 글에 써먹을 그 무엇이라도 챙깁니다. 인용거리일 수도 있고 흉내 내고 싶은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만들어지거나 과거 기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모두 나의 예비 글감이지요.

셋째, 내용만 파악하며 읽지 않고 어휘와 문장, 글의 구성을 유심히 봅니다. 평소 내가 잘 쓰지 않는 단어나 문형을 발견하면 머리에 담아둡니다. 좋은 문장은 베껴 써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글을 어떻게 시작해서 어떤 전개로 끌어갔는지, 마무리는 어떻게 했는지 눈여겨봅니다.

넷째, 저자의 생각에 의문을 가지고 반론하고 반박하며 읽기도 합니다. 나라면 어떻게 썼을까 하면서 말이죠. 또 이 책과 저 책의 내용을 비교하고 장단점을 분석하기도 합니다. 평론가의 관점으로요.

다섯째, 책의 목차를 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목차에는 책을 쓴 사람의 글쓰기 전략이 담겨 있습니다. 내 글에 써먹을 수 있는 저자의 작전지도를 파악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목차 하나하나는 글의 제목이지요. 제목을 어떻게 달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제목을 보며 글을 내용을 상상하거나 유추해봅니다. 내 글감을 얻을 수도 있고요.

여섯째, 읽은 내용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말해봅니다. 또 말하기 위해 메모하며 읽습니다. 책이나 온라인 메모장에 말할 거리를 이것저것 쓰거나 빈 종이에 내용을 요약해 도식화해보기도 합니다. 그래야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야 내 글에 써먹을 수 있더라고요.

글을 읽는 이유는 많겠지만, 그 가운데는 글을 쓰기 위해서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어야겠지요. 책을 읽는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책을 쓰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글쓰기. 게티이미지뱅크.
글쓰기. 게티이미지뱅크.

머지않아 누구나 책을 쓰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어디 나오고 어디를 다니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관심 있는지를 책으로 보여주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은퇴 이후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질 것이고, 어디에 소속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크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역할이 많지만 학생들이 커서 자신의 책 한두 권 정도는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자신이 무엇에 관심이 있고 남보다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스스로 찾게 해주고, 언젠가 그것을 책으로 쓰겠다는 마음을 심어준다면 학교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책 쓰기는 사회적으로 의미가 클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행복한 여정이 될 테니까요. 새해에는 또 어떤 책을 쓸까 즐거운 고민 중입니다.

강원국 |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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