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법원이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오류를 인정하고 정답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교육계에서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최상위권 수험생들의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른바 ‘킬러 문항’을 만들다가 제 발등을 찍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학생들이 문제를 못 풀게 하려는 목적으로 문제를 만들다보면 그만큼 오류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생명과학Ⅱ 20번은 집단 Ⅰ과 Ⅱ 중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 유지되는 집단을 찾아 3개의 보기 중 옳은 것을 고르는 문제다. 해당 문제의 난도는 세계적인 석학이 인정할 정도로 높았다. 생명과학Ⅱ 20번 문항 정답 결정처분 취소 행정소송 등을 제기한 수험생 92명은 소송 제기 이후부터 생명과학 분야 전문가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의견을 물었는데, 집단유전학 분야의 세계 최고 석학인 조너선 프리처드 미국 스탠퍼드 대학 교수가 이에 응답한 것이다. 프리처드 교수는 지난 11일 본인 연구실 소속 박사과정 연구원의 풀이 과정을 트위터로 공유했는데 이 연구원은 “이 문제에 유효한 풀이가 있다고 말하려면 의도적으로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며 “터무니없이 어렵고 (오류로 인해) 사실상 풀기가 불가능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프리처드 교수는 다음날 “고등학교 시험에서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다는 것이 놀랍다”고 트위터에 적었다.
20번 문항은 생명과학Ⅱ 킬러문항이었다. 초고난도 문항인 킬러문항은 상위권 수험생을 변별하기 위해 출제된다. 킬러문항은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되기도 하고,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되더라도 문제를 지나치게 꼬아 교사들조차 풀지 못하거나 상위권 학생들조차 찍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선행학습에 내몰렸다. 교육계에서는 킬러문항이 사고력 측정이라는 수능의 취지와 맞지 않고 사교육을 조장한다고 비판해왔다. 이에 지난 9월 강민정 열린민주당 의원 등은 수능에 킬러문항의 출제를 금지하는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공교육정상화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해당 법안엔 수능이 국가가 정한 고교 교육과정을 넘어선 내용을 평가하지 못하도록 규제해야 하며, 수능 문항이 교육과정 범위와 수준을 벗어났는지 교육부가 관리·감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최수일 수학교육혁신센터장은 “생명과학Ⅱ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의대 지망생이라는 점에서 평가원에서 최상위권을 가려내기 위해 관행적으로 킬러문항을 내는 것 같다”며 “학생들이 못 풀게 하려는 목적으로 짧은 기간 안에 억지로 문제를 꼬다보면 출제자도 검토에 한계가 있고 오류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93년 수능 도입 이후 복수 정답 또는 전원 정답처리된 문제는 올해 생명과학Ⅱ 20번을 포함해 모두 9개로 이 가운데 5개가 과학탐구였다. 이와 관련해 김동영 평가원 대학수학능력시험본부장은 이날 선고 직후 브리핑에서 과학탐구 영역의 잦은 오류 이유를 설명하면서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최첨단의 학술적인 결과와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문항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며 “그것에 맞춰서 교육과정이 정기적으로 개편이 되고, 그런 차이 속에서도 고등학교 수준을 넘는 보다 더 어려운 내용까지도 하나의 오차도 없이 문항 출제를 해야 되는 부담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평가원이 지난달 29일 학생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였다면 혼란이 덜했을 거라는 지적도 나왔다. 유성룡 에스티유니타스 교육연구소장은 “우리나라 최고 문제 출제기관에서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평가문항으로서의 타당성은 유지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문제가 더 커졌다”며 “당시 학생들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고 문항의 오류를 인정했다면 오히려 출제기관으로서의 신뢰성은 확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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