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하사의 복직 소송은 인권침해 사안이기에 빨리 재판을 진행했어야 하죠. 군뿐 아니라 인권의 보루여야 하는 사법부도 상당히 낙후돼 있어요.”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지난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에서 한 인터뷰에서 사법부의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임 소장이 고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는 메모들이 가득 붙은 추모판 앞에 서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군인,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군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충격과 함께 성찰을 던져주고 있다. 그를 좌절케 했던 높은 차별의 벽을 이제는 무너뜨려야 한다는 각성의 계기가 되고 있다. 변 하사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기로 결심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싸움을 도왔던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만나서 ‘변희수 복직과 명예회복’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변희수 하사의 장례식 다음날인 지난 6일 낮 휴대전화에 임태훈 군인권센터소장 이름이 떴다. 전화기 속에 흑흑하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한참 기다리자, 그는 겨우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변 하사 장례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주말에 전화했습니다. 변 하사 영정사진을 지난해 <한겨레> 토요판 커버(
“기갑의 돌파력으로 그런 차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하하” 2020년 3월21일치) 사진으로 썼습니다. 변 하사의 부모님이 그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사용했는데 한겨레 쪽에 미리 양해를 못 구해 죄송합니다.”
“제가 사진을 찍은 사람도, 한겨레 책임자도 아니지만 잘하셨습니다. 담당자들에게 그대로 전할게요.”
임 소장은 지난해 1월 변 하사가 강제전역 당한 날 기자회견을 주선하고, 그 뒤 국방부 및 육군을 상대로 이의신청과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을 주도해왔다. 변 하사 역시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크고 작은 문제를 임 소장에게 묻고 조언을 구했다. 그런 만큼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그에게 큰 슬픔과 아픔이었으리라. 지난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군인권센터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눈가에는 이따금 물기가 어렸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왼쪽)과 김겨울 트랜스해방전선 대표가 지난 12일 저녁 서울 국방부 앞에서 열린 변희수 하사를 추모하는 행사에서 참가 시민에게 촛불을 붙여 건네주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지난 12일 저녁 ‘변희수 하사 추모행동’에 참가한 한 시민이 국방부 정문 앞에서 촛불과 ‘프라이드 플래그’(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를 들고 있다.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공대위(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복직 소송을 계속하기로 했는데 당사자가 사라지고 없어도 소송이 가능한가요?
“피고인이 사망했을 경우에 가족이 이어받아서(수계) 소송을 진행할 수 있더군요. 변호인단이 서울고등법원에서 그렇게 했던 판례도 찾았어요. 밀린 월급과 퇴직금 등 가족들에게 이익이 있을 경우에는 소송 수계가 가능하다고 해요. 변 하사의 부모님이 변호인들과 상의한 뒤 수계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셨어요. 필요한 서류가 다 마련되는 대로 곧 법원에 신청서를 낼 예정이에요.”
―부모님도 소송을 계속하는 데 동의하셨다고요?
“그럼요. 변 하사의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게 유가족의 분명한 생각입니다.”
―변 하사 부모의 의지가 강한가 보군요.
“네. 저희에게 조의금도 다 기부하시겠다고 약정하셨고, 소송에서 이겨 월급 등을 받게 되면 그것도 다 기부하겠다고 하셨어요. 두 분은 오로지 희수의 명예회복과 복직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변 하사가 생전에 원하던 길을 뒤늦게나마 이루어 주는 것이 외동자식을 잘 보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 결심은 언제부터 하셨어요?
“수계 문제는 발인하는 날에 결심하셨어요. 복직 소송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를 가족분들이 계신 자리에서 말씀드렸더니 아버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하셨어요. 장례 초기에는 자식 잃은 슬픔에 막막해하고 힘들어하셨는데 얼굴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많이 조문 다녀가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하는 게 자식의 뜻에 맞는지를 정리하신 것 같아요.
지난 10일 서울에 올라오셔서는 ‘앞으로 있을 모든 문제는 군인권센터와 함께하겠다’고 하시더군요. 지난 금요일(12일) 저녁 국방부 앞에서 있었던 변 하사 추모 모임에도 원래는 참석하시려고 했어요. 그런 행사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저도 가면 안 돼요?’라고 물으시길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했더니 ‘가서 보고 싶어요’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청주로 내려가시는 바람에 참석을 못 하셨어요.”
지난해 4월 변 하사는 부모의 요청에 따라 짧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청주로 내려갔다. 본가로 들어가는 대신 부친이 마련해준 거처에서 따로 생활했다.
―변 하사가 생전에 부모로부터 지지를 받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요?
“부모님이 생활을 많이 보살펴준 것으로 아는데, 변 하사의 정체성 변화와 관련된 부분은 잘 모르니까 굉장히 낯설어하셨죠. 부모가 자식을 지지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정으로 썼던 사진은 크게 웃는 모습이었는데, 그 사진을 아버지께서 직접 고르셨다면서요?
“저희가 여러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아버님이 ‘이게 마음에 드네요’라면서 그것을 딱 짚더군요. 혹시 해서 군복 입은 사진 몇장을 다시 권해봤더니 ‘아니에요, 이 사진이 좋아요’라고 하셨어요. 저희도 사실 마음속으로 그 사진을 일순위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변희수 하사의 빈소 모습. 변 하사의 아버지는 영정사진으로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가 지난해 인터뷰 때 찍은 사진을 골랐다. 임태훈 제공
변 하사는 군에서 강제전역을 당한 뒤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청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바깥나들이는 ‘청소년 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 상담 겸 봉사활동을 하러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 오는 게 거의 다였다.
―청주에 내려간 뒤에도 자주 만났나요?
“띵동과 저희 군인권센터가 역할을 나눴어요. 심리적인 부분은 변 하사가 상담을 받았던 띵동이 담당하고, 저희는 소송 등 법률 지원에 역점을 뒀어요. 띵동에서 취업 지원도 열심히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잘 안됐어요. 그때마다 변 하사가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띵동에서 일부러 매주 불러서 여러 활동을 주고는 시급을 줬어요. 일정 정도 사회생활의 루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난해 저랑 인터뷰할 때만 해도 변 하사는 씩씩하고 낙관적이었는데 어떤 부분을 제일 괴로워했나요?
“띵동이 상담했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지만,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가장 큰 것은 군에 대한 배신감일 겁니다. 친구들이 하나같이 밀덕(군인 ‘덕후’의 약자)이라고 말할 정도로 변 하사는 군인을 천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한 자기 세계로부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추방당한 데 대한 좌절감이 매우 컸던 것 같아요. 또 구직활동이 잘 안되니까 사회에서 낙오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을 테고, 소송이 늘어지는 상황도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변 하사는 호르몬 치료를 시작한 즈음인 2019년 6월 “성전환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면서 군인권센터의 문을 노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군단장이나 여단장 등 상관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해 10월 타이로 수술하러 출국하기 전에 부대 상관들은 수술 목적의 국외 여행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수술 잘해서 빨리 돌아오길 바란다’는 내용의 격려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본인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다 지원할 것이지만, 다만 트랜지션(성전환)에는 리스크가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죠. 수술하고 돌아온 뒤에는 제가 당부한 게 하나 있어요. 군에서 의무심사를 하자고 하면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전역심사로 바로 가게 되니까 버티라고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의무심사를 받았다고 연락을 해왔어요. 그 얘기를 듣고는 카톡으로 제가 왜 그랬느냐고 싫은 소리를 했더니 변 하사는 ‘군에서는 다 인정하고 해외까지 보내줬는데, 소장님은 너무 군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저한테 따졌어요. 그만큼 그는 군을 믿고 있었고 군에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어요. 군을 정말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군이 잔인했던 거죠.”
지난해 2월 성별 정정이 이뤄진 뒤 군인권센터에서 축하 케이크를 받고 활짝 웃고 있는 변희수 하사. 임태훈 제공
―일선부대나 동료 군인들은 열린 생각을 하는데 군 최상층부가 여전히 낡은 사고에 젖어 있는 것 같죠?
“그렇죠. 전역심사위원회 때도 일선 지휘관들은 변 하사의 복무를 지지하는 의견서를 냈어요. 군정권을 가진 사람은 그런 것을 최대한 수용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낡은 편견을 갖고는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위에서 강제전역을 결정한 거잖아요.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이에요.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는 하나도 없이 성기 적출을 했으니 심신장애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댔어요.
군사·안보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연구보고서(‘트랜스젠더 군인의 공개적인 복무 허용에 대한 의의 평가’, Assessing the implications of allowing transgender personnel to serve openly)를 토대로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2016년에 전면 허용한 미국과 정확히 거꾸로죠. 군 수뇌부뿐 아니라 청와대 안보실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안보실이 그런 입장을 갖고 있기에 변 하사가 쫓겨난 겁니다.
이런 일은 대통령이 개입했어야 합니다. 전역심사를 앞두고 인권위가 긴급구제를 결정했으니까 인권위의 위상을 존중한다면 대통령이 나서서 국방부와 군에 대해서 최소한 일시 중단을 지시하거나 한번쯤 재고하라는 사인을 줬어야죠. 이런 식이면 앞으로 어느 부처가 인권위 결정을 따르겠어요. ‘강제성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끝이잖아요. 인권변호사 출신으로서 문재인 대통령이 다른 면모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아쉬워요.”
변희수 하사(가운데 검은 옷에 안경 쓴 이)가 지난해 8월 성소수자부모모임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임태훈 제공
대학 때부터 성소수자의 권익 옹호 활동을 한 임 소장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취급하는 징병검사와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군형법의 폐지를 요구하면서 2004년 병역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제앰네스티 등은 그를 양심수로 선정하고 석방운동을 벌였다. 2005년 8월 석방된 뒤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사업인 군인권실태조사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군인들의 인권 문제를 전담하는 시민단체인 군인권센터를 설립(2009년)했다. 군인권센터는 선임병들의 집단 구타로 사망한 이른바 ‘윤 일병 사건’(2014년) 등 군대 내의 폭행과 성폭력 등 반인권적 행태를 고발해 개선책을 마련하는 데 앞장서 왔으며, 촛불시위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가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려고 획책했던 사건도 폭로했다.
―변 하사의 복직 소송을 이기면 군에 변화가 올까요?
“최소한 앞으로는 성전환 군인에 대한 전역 조처가 불가능해지죠. 지금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를 받고 있는 군인이 꽤 되는데 그들에 대한 보호막은 생기는 거죠. 그런 것을 넘어서서 국방부와 군이 빨리 정책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에 언제까지 차별적인 조항을 유지할 수는 없잖아요. 성소수자들도 포용하는 군대가 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군뿐 아니라 인권의 보루여야 하는 사법부도 상당히 낙후돼 있는 것 같아요. 변 하사의 재판만 하더라도 인권침해 사안이기에 빨리 진행했어야 하는데 첫 재판이 8개월 만에야 잡혔잖아요. 평화적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홍정훈, 오경택씨에 대한 최근 대법원 판결(2월25일)도 사법부의 낮은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죠. 대체복무제 도입을 이끌어낸 당사자(홍정훈)를 감옥에 보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병무청의 대체역심사위원회는 비슷한 시기에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를 수용했거든요. 보수적인 인물이 많은 대체역심사위보다도 사법부의 인권 의식이 뒤떨어지는 거죠.”
오는 31일은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국제 기념일이다. 변희수 공대위는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을 앞당겨 주말인 27일 국방부 주변에서 집회를 여는 등 집중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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