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성자’ 새빛맹인선교회 안요한 목사
베스트셀러 ‘낮은 데로 임하소서’ 주인공
맹인 위한 30년 사역정리 ‘그 이후’ 출간
“제 존재가 슬픈 영혼에 한줌 힘이 됐으면”
베스트셀러 ‘낮은 데로 임하소서’ 주인공
맹인 위한 30년 사역정리 ‘그 이후’ 출간
“제 존재가 슬픈 영혼에 한줌 힘이 됐으면”
새빛맹인선교회 안요한 목사는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이 1981년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실제 주인공이다. 소설은 37살에 실명한 젊은이가 절망을 극복하고 목사가 되어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을 열고 시각장애인들을 재활의 길로 이끄는 과정을 감동 깊게 그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이듬해에는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대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 중도실명자의 휴먼 드라마가 세상에 알려진 지 30년이 흘렀다. 그새 안 목사는 전세계를 다니며 자신의 신앙을 전파하는 유명 종교인이 되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와 재활원을 운영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시각장애인 양로시설을 설립하는 등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당시 안 목사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안 목사의 ‘그 후’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안 목사 자신도 지난 30여년의 ‘사역’ 활동을 정리한 책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 이후>(홍성사)를 펴냈다. 그가 30년 넘게 이끌고 있는 새빛맹인선교회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카페골목을 조금 지나서 있었다. 지은 지 20년이 된 5층 건물에는 그의 사무실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재활시설, 숙소 등이 들어 있었다. 안 목사는 인자하고 학식 있는 노신사의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실명하신 게 37살 때였지요?
“아버지가 목사이셨는데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아버지 교회 문앞에 ‘하나님은 없다’라고 써붙이며 반항하기도 했어요. 아버지를 가난한 목사로 만들어 우리 가족을 고생시킨 게 하나님이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려고 일부러 애썼어요. 결혼을 하고 두 딸을 키우며 잘 사는데 어느 날부터 눈이 안 보기 시작했어요.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 세상에 좋다는 치료 다 받아보고, 등에다 바늘을 꽂는 무식한 치료도 받아보았지만 결국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절망에 빠졌다. 다들 그의 인생이 끝났다고 했다. 아내마저 사랑하는 두 딸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났다. “소설이나 영화나 다 제 집사람이 저를 버리고 떠난 걸로 묘사했지만, 냉정히 말해 아내가 날 버린 게 아니라 사회가 날 버린 겁니다. 제가 실명할 당시 맹인은 저주받은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저는 집사람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절망의 늪을 헤매며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새벽 ‘성령의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구약성경> 320쪽 여호수아 1장 5절이 그 ‘말씀’이었다고 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내가 어디든지 너와 함께하겠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어줄 것이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계시’를 느낀 요한은 빈집을 벗어나 보이지 않는 눈으로 거리에 나섰다. 6개월여를 교통사고 위험과 배고픔과 놀림을 견디며 서대문 일대를 거지처럼 전전하다 그가 다다른 곳은 서울역이었다. “거기서 구두닦이 껌팔이 넝마주이 등을 하는 집 없는 소년들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 아이들의 소망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복 입고 학교 가는 학생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그들은 내가 잠시 학교에서 불어 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야, 이 아저씨가 선생님이래!’라며 좋아했어요. 내가 맹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가웠던 겁니다.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선생님이 되어달라는 뜨거운 호소를 들었을 때 제 마음도 같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내가 왜 맹인이 됐는지, 왜 서울역에 왔는지를,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미국 선교단체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쓴 여섯 번째 편지에 미국의 한 재단이 응답했다. 그에게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어렵게 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요한이 맨 먼저 시작한 것은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이었다. “동정받는 맹인이 아니라 맹인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뭘 어떻게 이바지한다는 말이냐고 하길래 나보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과 삶의 의미를 심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도와주더라고요.” 그가 미아리에 세운 야학은 ‘진흥야간중학교’였다. 의식있는 대학생들이 찾아와 교사를 자청해 곧 훌륭한 학교가 되었다.(진흥중학교는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이 되기까지 약 15년간 827명의 청소년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문을 닫았다.) 야학이 유명해지고 교장이 맹인이란 소문이 나자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둘 그를 찾아왔다. 그게 교회가 되고 재활원이 되었다. 2006년에는 어렵게 돈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양로원을 용인에 세웠다. -복지 사업을 오래 하셨는데, 고단할 때도 많았지요? “어려울 때면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핍박하고 박해한 사람들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저도 참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보았습니다. 저를 맹인사역에서 끌어내리려던 사람들, 제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맹인들, 저를 곤경에 빠뜨리고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사람들… 그때마다 참고, 용서하라는 아버지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거라, 축복은 부메랑이다, 그 기도와 용서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들어오다 보니 ‘시력을 잃었다고 비전마저 잃은 건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더군요. “저희는 여기 계신 생활보장수급 대상자 분들께는 개인 통장을 만들어줍니다. 생계 지원금 40만원 내외와 장애인 수당을 모두 저축하도록 유도합니다. 착실히 모으면 몇년 안에 1000만원, 1500만원이 넘고 그것으로 장애인 임대아파트 같은 거 구해서 자립할 수 있게 해요. 그러면 떠나갔던 가족들이 찾아와 다시 가정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회복지를 하는 가장 큰 행복이요 보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 시설은 다른 곳에 비해 인기가 높아요. 빈자리가 생기면 서로 들어오려고 하지요.” -시설에 계신 분들도 문화생활은 좀 하는 편입니까? “눈만 못 볼 뿐 사람의 마음이야 똑같습니다. 영화 감상도 하고 야구 구경도 자주 하고 싶어하지요. 저도 야구팬인데 야구 있는 날은 뒤집어져요.” -정말 구경이 됩니까? “그럼요. 야구장 가면 1루 쪽 스탠드에 앉혀줘요. 딱, 치는 소리 나면 다 알아요, 안타인지 아닌지. 앗, 저건 넘어갔네 하면 정말 홈런이에요. 투수 교체 시기도 곧잘 맞히는걸요. 하하.”
-대단하군요. 개인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한때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학적 소견이 있었다고 책에 나와 있던데요? 왜 회복 시도를 안하셨습니까? “제 눈에 얽힌 사건이 참 많아요. 83년인가 독일에 갔을 때는 제 시신경이 살아 있다며 수술하면 80% 이상 회복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기뻐서 일주일을 잠도 못 잤어요. 그런데 막상 수술 동의 사인을 하려는 순간, 보고 싶은 마음이 구름 걷히듯 사라지는 거예요. 이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싹 걷어가버린 거예요. 아직 볼 때가 아니라는 거죠. 누가 상처받은 맹인의 마음을 움직이겠습니까? 같이 눈먼 제 말이 가장 잘 먹힙니다. 맹인이 되어서 오히려 수지맞았다고 하는 제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도 쭈욱 계속되고 있는 거지요.(웃음) 보고 안 보고는 이제 저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3자가 볼 때는 연세가 많아지는데 더 늦기 전에 볼 수 있게 되면 좋지 않겠나 싶은 생각입니다만. “그렇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빨리 나이 안 드냐고 그래요.(웃음) 그런데 저 아직 괜찮아요. 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세포조직도 안 늙나봐요.” -부인을 만나 함께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1979년 워커힐호텔에서 세계장애인봉사자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아내는 재활의학을 전공한 물리치료사였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자기도 돕고 싶대요. 그래서 우리 야학에서 교사를 하던 중에 제 빨래며 식사며 챙겨주다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를 도와주던 소년이 집사람에게 ‘누나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꼬드겼대요.” -반대가 많았을 것 같은데. “저보다 16살이나 어린데다 아주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어요. 언니들이 저에게 예수 장사꾼이다, 사기꾼이다 그러면서 난리가 났어요. 그때 집사람이 ‘집안에 딸이 많으니 저 하나 놓아달라’고 아버지에게 빌었답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난 30여년의 제 사역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내는 저의 누나이자 상담자이며 최고의 사모입니다. 아들도 하나 얻었고요. 결사반대하던 처가 식구들도 이제는 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는 집안에서 큰소리 좀 칩니다.(웃음)” -실명 후 헤어진 두 딸은 만나보셨나요? “제가 방송에도 나가고 했으니 절 알겠지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 왔다 갔는지도 모르겠고… 간접적으로 사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아직 직접 만나진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더 잘 길러주시고 공부 많이 하고 결혼도 잘한 것 같아요. 먼저 집사람이 수고했어요.” -찾아오면 만나주시겠지요? “그럼요. 언제라도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만 만남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려 해요. 뭐,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요.” -아버지 안진삼 목사나 어머니가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개척교회 뒷바라지를 하느라 평생을 고생하며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일자무식이었지만 자식 사랑은 끔찍했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간증하러 갈 때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여비에 보태 쓰라며 제 손에 돈을 쥐여주셨습니다. 얼마인지 아십니까? 1달러였습니다. 25년 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수십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잃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시다가 미국 가는 아들에게 큰돈인 줄 아시고 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1달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100쇄를 넘게 찍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나왔나요? “저의 이야기가 교회에 알려지면서 소설가들이 미아리 맹인교회로 많이 찾아왔지만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월세를 못 내 야학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준 분이 고은아(영화배우) 권사님이었지요. 그분 동생이 당시 출판사를 했는데 이청준씨를 모시고 왔어요. 이틀 동안 구술을 했지요. 소설이 나온 건 제가 미국 간증 여행 갔을 때였어요. 1년 뒤 귀국해서는 이장호 감독이 찾아와 제 얘길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소설도 영화도 제가 없는 사이에 이뤄졌지요. 어쨌든 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을 본 줄 아는데 괜한 오해만 받았지, 저에겐 판권도 저작권도 없어요. 책과 영화를 통해 복음을 많이 전했으니 그것으로 난 됐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역을 한 이장호 감독 동생도 실명했다지요? “그게 깊은 뜻이 있었어요. 이영호씨는 영화 촬영 당시 이미 80% 실명이 진행중이었대요. 이 감독이 동생에게 제 역을 맡겨 용기를 주려고 했답니다. 실명의 위기에 있던 동생에게 준 형의 선물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국 완전히 못 보게 되었다는군요. 얼마 전에 이 감독이 전화를 해서 동생을 위로해 달라고 하더군요. 내일이나 모레쯤 한번 가보려고 해요.” -소설의 후편을 쓰신 건 알던가요? “아 참, 이 감독이 모르고 있더군요. 깜짝 놀라서, 빨리 책을 보내달라고 해요.” -후편도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요? “내용적으로 보면 전편보다는 영화가 되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후편엔 저와 아내의 로맨스도 있으니 잘 살리면 또 모르죠 뭐, 허허. 막말로 영화쟁이들이니. 만들어주면 저야 좋지요.” -시설 운영이나 선교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이 있으면 이 기회에 하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이인우 기자님, 저 인터뷰 많이 했어요. 인터뷰하는 사람마다 사역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데, 인터뷰 나가고 나면 도움주는 분보다 도와달라는 분이 더 많았어요. 심지어 약간 사기성도 있었고. 그래서 가급적 그런 건 피하고 그냥 복음 전하는 말만 할래요. 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연말이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행사도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은 때이니 우리 한겨레신문이 좋은 분들 많이 발굴해서 기사로 다뤄주세요. 그게 저희 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가려는데 안 목사가 만류한다. “아니, 그냥 가지 마세요. 기도하고 가세요.” 그러면서 안 목사는 축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이인우 기자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만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있는 대로 말했으니 하나님 은혜로 잘 표현이 되어 기사를 읽는 분 중에 어려운 분이 계시면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게 해주십시오.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이인우 기자가… 일흔이 넘은 맹인 목사가 기도를 해주니 종교와는 다소 거리가 먼 기자도 엉겁결에 따라서 기도를 하는데, 왜 자꾸만 실눈이 떠지는 것인지… 어쨌든 목사님, 축도 감사합니다. 아멘. 선교회 건물을 나서려는데 여성 간사 한분이 뒤따라 나와 조심스레 봉투를 내민다. 점심 대접도 못했는데 가시다가 식사라도, 너무 적어서… 하도 간곡히 권하기에 그냥 받아들고 나왔다. 이 점심값을 어떻게 돌려드리면 서로가 덜 어색할까 생각해보면서 방배동 카페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늦가을 오후 햇살이 따사로웠다. 새빛맹인선교회 후원은 우리은행 188-05-000030, 예금주 안요한 목사.
요한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미국 선교단체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가 쓴 여섯 번째 편지에 미국의 한 재단이 응답했다. 그에게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장학금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시각장애인의 몸으로 어렵게 신학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요한이 맨 먼저 시작한 것은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이었다. “동정받는 맹인이 아니라 맹인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당신이 뭘 어떻게 이바지한다는 말이냐고 하길래 나보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과 삶의 의미를 심어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많은 분들이 도와주더라고요.” 그가 미아리에 세운 야학은 ‘진흥야간중학교’였다. 의식있는 대학생들이 찾아와 교사를 자청해 곧 훌륭한 학교가 되었다.(진흥중학교는 중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이 되기까지 약 15년간 827명의 청소년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고 문을 닫았다.) 야학이 유명해지고 교장이 맹인이란 소문이 나자 시각장애인들이 하나둘 그를 찾아왔다. 그게 교회가 되고 재활원이 되었다. 2006년에는 어렵게 돈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양로원을 용인에 세웠다. -복지 사업을 오래 하셨는데, 고단할 때도 많았지요? “어려울 때면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핍박하고 박해한 사람들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저도 참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보았습니다. 저를 맹인사역에서 끌어내리려던 사람들, 제 속을 무던히도 썩이던 맹인들, 저를 곤경에 빠뜨리고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사람들… 그때마다 참고, 용서하라는 아버지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거라, 축복은 부메랑이다, 그 기도와 용서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들어오다 보니 ‘시력을 잃었다고 비전마저 잃은 건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더군요. “저희는 여기 계신 생활보장수급 대상자 분들께는 개인 통장을 만들어줍니다. 생계 지원금 40만원 내외와 장애인 수당을 모두 저축하도록 유도합니다. 착실히 모으면 몇년 안에 1000만원, 1500만원이 넘고 그것으로 장애인 임대아파트 같은 거 구해서 자립할 수 있게 해요. 그러면 떠나갔던 가족들이 찾아와 다시 가정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회복지를 하는 가장 큰 행복이요 보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 시설은 다른 곳에 비해 인기가 높아요. 빈자리가 생기면 서로 들어오려고 하지요.” -시설에 계신 분들도 문화생활은 좀 하는 편입니까? “눈만 못 볼 뿐 사람의 마음이야 똑같습니다. 영화 감상도 하고 야구 구경도 자주 하고 싶어하지요. 저도 야구팬인데 야구 있는 날은 뒤집어져요.” -정말 구경이 됩니까? “그럼요. 야구장 가면 1루 쪽 스탠드에 앉혀줘요. 딱, 치는 소리 나면 다 알아요, 안타인지 아닌지. 앗, 저건 넘어갔네 하면 정말 홈런이에요. 투수 교체 시기도 곧잘 맞히는걸요. 하하.”
-대단하군요. 개인적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한때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학적 소견이 있었다고 책에 나와 있던데요? 왜 회복 시도를 안하셨습니까? “제 눈에 얽힌 사건이 참 많아요. 83년인가 독일에 갔을 때는 제 시신경이 살아 있다며 수술하면 80% 이상 회복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기뻐서 일주일을 잠도 못 잤어요. 그런데 막상 수술 동의 사인을 하려는 순간, 보고 싶은 마음이 구름 걷히듯 사라지는 거예요. 이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거예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싹 걷어가버린 거예요. 아직 볼 때가 아니라는 거죠. 누가 상처받은 맹인의 마음을 움직이겠습니까? 같이 눈먼 제 말이 가장 잘 먹힙니다. 맹인이 되어서 오히려 수지맞았다고 하는 제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도 쭈욱 계속되고 있는 거지요.(웃음) 보고 안 보고는 이제 저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제3자가 볼 때는 연세가 많아지는데 더 늦기 전에 볼 수 있게 되면 좋지 않겠나 싶은 생각입니다만. “그렇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빨리 나이 안 드냐고 그래요.(웃음) 그런데 저 아직 괜찮아요. 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세포조직도 안 늙나봐요.” -부인을 만나 함께한 지 30년이 넘었습니다. “1979년 워커힐호텔에서 세계장애인봉사자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아내는 재활의학을 전공한 물리치료사였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자기도 돕고 싶대요. 그래서 우리 야학에서 교사를 하던 중에 제 빨래며 식사며 챙겨주다가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를 도와주던 소년이 집사람에게 ‘누나가 좀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꼬드겼대요.” -반대가 많았을 것 같은데. “저보다 16살이나 어린데다 아주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어요. 언니들이 저에게 예수 장사꾼이다, 사기꾼이다 그러면서 난리가 났어요. 그때 집사람이 ‘집안에 딸이 많으니 저 하나 놓아달라’고 아버지에게 빌었답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난 30여년의 제 사역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내는 저의 누나이자 상담자이며 최고의 사모입니다. 아들도 하나 얻었고요. 결사반대하던 처가 식구들도 이제는 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는 집안에서 큰소리 좀 칩니다.(웃음)” -실명 후 헤어진 두 딸은 만나보셨나요? “제가 방송에도 나가고 했으니 절 알겠지요. 제가 모르는 사이에 교회에 왔다 갔는지도 모르겠고… 간접적으로 사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아직 직접 만나진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더 잘 길러주시고 공부 많이 하고 결혼도 잘한 것 같아요. 먼저 집사람이 수고했어요.” -찾아오면 만나주시겠지요? “그럼요. 언제라도 만나고 싶어요. 그렇지만 만남 자체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려 해요. 뭐,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요.” -아버지 안진삼 목사나 어머니가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개척교회 뒷바라지를 하느라 평생을 고생하며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일자무식이었지만 자식 사랑은 끔찍했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간증하러 갈 때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여비에 보태 쓰라며 제 손에 돈을 쥐여주셨습니다. 얼마인지 아십니까? 1달러였습니다. 25년 전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수십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잃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시다가 미국 가는 아들에게 큰돈인 줄 아시고 주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1달러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는 100쇄를 넘게 찍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나왔나요? “저의 이야기가 교회에 알려지면서 소설가들이 미아리 맹인교회로 많이 찾아왔지만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월세를 못 내 야학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을 때 도와준 분이 고은아(영화배우) 권사님이었지요. 그분 동생이 당시 출판사를 했는데 이청준씨를 모시고 왔어요. 이틀 동안 구술을 했지요. 소설이 나온 건 제가 미국 간증 여행 갔을 때였어요. 1년 뒤 귀국해서는 이장호 감독이 찾아와 제 얘길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소설도 영화도 제가 없는 사이에 이뤄졌지요. 어쨌든 저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경제적으로도 큰 이득을 본 줄 아는데 괜한 오해만 받았지, 저에겐 판권도 저작권도 없어요. 책과 영화를 통해 복음을 많이 전했으니 그것으로 난 됐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역을 한 이장호 감독 동생도 실명했다지요? “그게 깊은 뜻이 있었어요. 이영호씨는 영화 촬영 당시 이미 80% 실명이 진행중이었대요. 이 감독이 동생에게 제 역을 맡겨 용기를 주려고 했답니다. 실명의 위기에 있던 동생에게 준 형의 선물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결국 완전히 못 보게 되었다는군요. 얼마 전에 이 감독이 전화를 해서 동생을 위로해 달라고 하더군요. 내일이나 모레쯤 한번 가보려고 해요.” -소설의 후편을 쓰신 건 알던가요? “아 참, 이 감독이 모르고 있더군요. 깜짝 놀라서, 빨리 책을 보내달라고 해요.” -후편도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요? “내용적으로 보면 전편보다는 영화가 되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후편엔 저와 아내의 로맨스도 있으니 잘 살리면 또 모르죠 뭐, 허허. 막말로 영화쟁이들이니. 만들어주면 저야 좋지요.” -시설 운영이나 선교에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이 있으면 이 기회에 하셔도 좋습니다. “사랑하는 이인우 기자님, 저 인터뷰 많이 했어요. 인터뷰하는 사람마다 사역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는데, 인터뷰 나가고 나면 도움주는 분보다 도와달라는 분이 더 많았어요. 심지어 약간 사기성도 있었고. 그래서 가급적 그런 건 피하고 그냥 복음 전하는 말만 할래요. 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삶의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연말이 되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행사도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은 때이니 우리 한겨레신문이 좋은 분들 많이 발굴해서 기사로 다뤄주세요. 그게 저희 같은 사람들 도와주는 겁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가려는데 안 목사가 만류한다. “아니, 그냥 가지 마세요. 기도하고 가세요.” 그러면서 안 목사는 축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이인우 기자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만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있는 대로 말했으니 하나님 은혜로 잘 표현이 되어 기사를 읽는 분 중에 어려운 분이 계시면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게 해주십시오. 감사와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이인우 기자가… 일흔이 넘은 맹인 목사가 기도를 해주니 종교와는 다소 거리가 먼 기자도 엉겁결에 따라서 기도를 하는데, 왜 자꾸만 실눈이 떠지는 것인지… 어쨌든 목사님, 축도 감사합니다. 아멘. 선교회 건물을 나서려는데 여성 간사 한분이 뒤따라 나와 조심스레 봉투를 내민다. 점심 대접도 못했는데 가시다가 식사라도, 너무 적어서… 하도 간곡히 권하기에 그냥 받아들고 나왔다. 이 점심값을 어떻게 돌려드리면 서로가 덜 어색할까 생각해보면서 방배동 카페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늦가을 오후 햇살이 따사로웠다. 새빛맹인선교회 후원은 우리은행 188-05-000030, 예금주 안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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