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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사회 약자에게 한국은 아직 야만국가”

등록 2010-07-25 19:36수정 2010-09-10 10:37

창간 22돌 기획 대논쟁 <한국사회 미래를 말하다>
‘복지국가’ 연구해온 고세훈 교수 인터뷰
“우리에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복지국가, 한국’에 대한 고세훈 교수의 결론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현장에서 고통 받는 (서민의) 숫자가 날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전망은 밝지 않다. 하지만 미래 한국이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고 교수는 이를 위해 정치의 복원과 이를 통한 민주주의 심화를 강조했다. 특히 비례대표제 확대 등 선거제도의 개혁을 통해 진보정치의 정치적 지형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고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21일 오후 4시 한겨레신문사에서 이뤄졌다.

-올해 들어 시민사회계나 정계 등에서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목소리가 많다. 어떻게 보고 있나?

“선진 자본주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는 대부분 선진 복지국가이다. 아마 복지국가가 아니었다면, 대공황 이래 여러 차례 경제위기들이 극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의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려를 한국의 보수진영에까지 퍼지게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하면서 진보진영도 결국 복지국가를 성취 가능한 현실적 최대치로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나아가 빈곤과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면서, 담론과 구호 수준에서나마 더는 복지를 방치할 수도 없는 실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오늘날 복지는 이데올로기와 정파를 떠나 주창되고 있다. 하지만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방대한 예산 배정이 뒤따르는 험난한 길이다. 그것은 정치적 끌고 당기기의 혹독한 여정이다.”

실업·비정규직 등 양산 가능성 커지는데
복지지출, 제3세계 상당수 국가보다 적어

-복지국가를 정의한다면? 의외로 명쾌하지 않은 듯하다.

“복지국가란 자본주의가 낳는 시장실패를 정치를 통해 교정하려는 장치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살리려는 정치적 자구책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것을 상품화시킨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을 시장에 내다 팔아 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노동을 상품화시킬 수 없거나 불완전하게 상품화시킬 수밖에 없는 ‘시장탈락자’를 양산한다. 실업자, 비정규직, 장애인, 노약자 등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시장이 발생시킨 문제이고 따라서 시장이 스스로 해결 못 한다. 정치가 나설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내친 사회경제적 약자를 정치마저 배려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무의미하거나 해악적이다. 한국에서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가, 특히 약자 계층을 중심으로 팽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국가복지가 상당히 확대됐는데?

“김대중 정부가 한국 복지의 기본 골격을 일궈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엠에프(IMF) 환란이 초래한 엄청난 사회적 위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당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처였다. 아직도 한국은 국가가 보험관리자에 불과할 정도로 복지 지출이 저열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관련 지출은 선진국의 4분의 1에 불과하며, 제3세계에 속했던 상당수 국가들에 비해서도 낮다.”

-우리 사회의 대안, 미래는 복지국가 외에는 없나?

“영국의 정치인이며 사회학자인 데이비드 마퀀드는 복지국가는 20세기 유럽문명의 가장 찬란한 업적이라고 말했다. 복지는 보편적 가치이며 규범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안정화시키고 인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지극히 현실적인 해법이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는 약자가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가를 보면 즉각 알 수 있다. ‘장애는 개인적 특성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일 뿐’이란 유명한 언명은 복지국가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해 준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아직 야만국가일지 모른다. 약자의 문제는 곧 관계의 문제라는 인식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합의가 있을 때 비로소 복지국가는 가능하다. 복지국가를 위한 일체의 제도적, 정치적 기반, 역사적 전통이 없는 우리에게 별도의 복지모델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정치를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한국 정치를 보면 회의가 드는데.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나라마다 복지국가의 정도가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복지에 가장 많은 이해관계를 지닌 진보정치는 국가복지 제도를 선도하거나 추동할 만한 권력자원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총수와 주주이익을 주로 대변하는 기업의 지배구조는 종업원이나 하청업체 등 이해관계의 직접적 당사자들을 배제하고 있다. 당연히 실업자, 비정규직 등 시장탈락자들을 양산할 가능성이 날로 커가고, 그럴수록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국가복지예산에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시장탈락자들을 다시 시장에 복귀시키기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사실상 부재에 가깝다. 한국 사회 또한 반정치, 반국가, 반노동, 민영화, 성장주의 등 반복지 담론에 깊이 물들어 있고, 우린 역사적으로도 이렇다 할 복지전통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단기적으로 한국 국가복지의 전망은 결코 밝지 않다.”

-정치도 그렇지만 성장지상주의 담론도 복지국가 발전의 오랜 걸림돌이었다.

“선진국들은 일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우리보다 훨씬 작던 1950~60년대에 이미 복지국가의 골격을 완성했다. 오늘날의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했던 80년대에는 복지국가 위기론이 거론될 정도로 국가복지는 성숙 단계에 들어섰다. 선진복지국가의 사례는 성장, 투자, 분배, 복지는 함께 간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장은 분배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며 분배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도 아니다. 성장전략과 더불어 분배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성장은 분배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성장의 꼭짓점은 과연 어디인가? 성장은 또다른 성장을 외치게 할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장 그 자체가 이미 권력적 현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성장전략은 통상 빈곤, 대량 실업, 고용 불안을 ‘활용하여’ 추진되며, 그 과정은 곧 기득권층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미국이 성장이 부족해서 복지국가가 아닌 것이 아니며, 한국이 분배를 하기엔 성장이 아직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진보권력 취약해 예산·제도 뒷받침 더뎌
선진국 ‘복지’ 덕에 수차례 경제위기 극복

-우리 사회는 이른바 ‘반복지의 덫’이 유달리 공고한 것 같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정치적 위상이 취약하다는 점, 여기에 사회에 팽배한 반국가, 성장주의, 반정치, 노동경시 풍조, 지역정서, 냉전주의 등 담론과 정서가 보태지면, 한국은 영락없이 반복지의 덫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민들의 삶을 담보로 국가(정치), 노동시장, 기업이 핑퐁하듯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한다. 복지국가도 아닌데 복지국가 위기론을 거론하거나, 국가의 복지 역할이 지극히 초보적인데 민영화 대세론을 운운하는 것은 국가자원을 독식하고 공동체를 포기하겠다는 기득권층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태다. 이런 담론들은 계급이익에 터잡은, 정치적, 권력적 담론들이다.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복지국가)위기론은 부자들의 반란일 뿐이라고 못박았었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복지국가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한 국가들에서 오히려 이런 반복지 담론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복지국가 도입에 저항하는 기득권층의 권력자원이 그만큼 크고 그 영향력이 전방위적으로 행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선차적으로 이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맥락과 정도는 다르지만, 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정파를 넘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복지국가는 국민총생산과 국가예산의 상당 부분을 배정해야 하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는 보수진영의 시혜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예산 배정을 둘러싼 정치세력, 정당들 간의 타협과 협상이 필수적이지만, 모든 협상과 거래는 협상 당사자들의 권력자원의 대등성을 웬만큼 전제한다. 그런데도 한국 진보진영의 권력자원(노조 조직률, 정당 지지도, 집권 가능성)은 극도로 취약하다. 따라서 한국적 실정에서 복지국가 진입은 중장기적 전망일 수밖에 없다. 가장 시급한 일은 범진보진영이 무책임한 소모적 논쟁을 멈추고 단일의 대오를 갖추는 일이다. 심상정이나 노회찬 같은, 이미 검증된 일당백의 진보 정치인들을 의회에 진출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제도가 약하면, 개인이 제도의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앙과 지방선거에서 비례대표 원칙을 점차 넓혀 선거의 민주성을 확대해나가는 일 또한 진보세력의 정치적 진입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끝으로 복지 한국을 위한 좀더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한다면?

“정치가 복원돼서 국가, 기업, 노동시장을 아우르는 민주주의의 제도화가 이뤄져야 한다. 우선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체제, 선거제도 등 국가영역의 민주화가 확대돼야 한다. 서유럽의 경험을 보면, 복지국가의 확대와 성숙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통해 비로소 가능했다.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제 도입과, 국회의원 비례대표제 확대 등을 통해 진보진영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치권에 이 일을 맡기기 어렵다면, 비례대표 도입을 위한 단일 이슈의 시민운동도 필요하고, 이 문제를 직접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식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일단 국가 차원의 민주화가 심화되면, (분배 영역에서) 국가복지를 확대하고 (생산 영역에서) 시장(기업)의 민주화를 일구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처럼 국가, 기업, 사회가 서로 복지책임을 떠넘기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현장에서 고통 받고 소외되는 개인들은 숫자는 날로 늘어날 것이다. 우리에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고세훈 교수가 지난 21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세훈 교수가 지난 21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고세훈 교수는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이다. 복지국가 이론과 영국 정치에 관한 연구가 깊다. <영국노동당사>(1999)와 함께 <복지국가의 이해>(2000), <국가와 복지>(2003), <복지 한국, 미래는 있는가>(2007) 등 역저를 잇달아 내 주목을 받았다. 최근에는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삶과 사상을 다룬 1600쪽이 넘는 전기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번역했으며, 조지 오웰의 평전도 곧 내놓을 예정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을 특히 중시한다. 고 교수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석사)를 거쳐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창곤 기획취재팀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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