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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희망을 꿈꿨던 곳’ 타이에서 돌아온 변희수의 군복

등록 2022-02-26 09:29수정 2022-02-26 16:40

[한겨레S] 특집
2월27일 고 변희수 하사 1주기

생전 즐겨 입던 군복, 방콕서 발견
중고 수출업체 통해 팔려나간 듯
‘성별 위화감’ 지웠던 도시에서
교민이 발견해 유족에게 전달
타이 방콕의 잡화점에 중고 의류로 내걸렸다가 교민에게 발견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고 변희수 하사의 군복 상의. 군인권센터 제공
타이 방콕의 잡화점에 중고 의류로 내걸렸다가 교민에게 발견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고 변희수 하사의 군복 상의. 군인권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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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이어서 종무식이니 뭐니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지만, 박종수(가명·54)씨는 지난해 12월31일 오전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해가 바뀌면 타이(태국) 생활도 5년째가 되기에 사무실은 대표인 그가 없어도 그럭저럭 돌아가는데다가 연일 일이 많아 이날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그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교통 상황을 체크했다. 서민과 중산층이 주로 사는 방콕의 후아이쾅에 집과 사무실이 있어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지만, 연말이어서 그런지 교통 체증이 평소보다 심했다. 할 수 없이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 길은 거의 다니지 않아요. 어쩌다 가는 길이죠.”(지난 22일 통화, 이하 동일)

아침을 거른 탓인지 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편의점이 눈에 띄자, 그는 속을 달랠 거리를 구하려고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서 나온 뒤 차에 오르기 전 담배를 한대 꺼내 피울 때였다. 편의점 바로 옆에 있던 허름한 잡화점 가게의 진열대에 매달려 있는 한국군의 군복 상의가 눈에 띄었다. 한국군 군복이나, 후보 이름이 새겨진 철 지난 선거운동 점퍼 등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가끔 방콕 거리에서 봤기에 특별할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가까이 가서 봤더니 군복이 두 벌 있었어요. 구형 야상(야전 상의)이 위에 있었고, 그 아래쪽에 군복 신형 상의가 하나 더 있는데, 명찰과 부대명이 그대로 달려 있었어요. 변희수라고 명찰에 적혀 있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 같았어요. 확인해볼 겸 해서 일단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뒀어요.”

방콕의 서민 및 중산층 거주 지역인 후아이쾅에 있는 한 잡화점에 걸려 있는 고 변희수 하사의 군복 상의. 방콕에 사는 박종수(가명)씨가 찍어 김보라미 변호사에게 보냈다. 박종수씨 제공
방콕의 서민 및 중산층 거주 지역인 후아이쾅에 있는 한 잡화점에 걸려 있는 고 변희수 하사의 군복 상의. 방콕에 사는 박종수(가명)씨가 찍어 김보라미 변호사에게 보냈다. 박종수씨 제공

고 변희수 하사가 2020년 3월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군인권센터에서 <한겨레> 토요판과 인터뷰 도중 웃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 변희수 하사가 2020년 3월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군인권센터에서 <한겨레> 토요판과 인터뷰 도중 웃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방콕 거리 잡화점에 내걸린 군복

그날 저녁 업무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박씨는 인터넷으로 변희수를 검색했다. 변희수에 대한 기사 몇개와 <에스비에스>(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지난해 4월 방송한 것을 보고는 군복의 주인공이 한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군인이었던 고 변희수 하사임을 알았다. 곧바로 방송에 나온 변 하사의 변호인인 김보라미 변호사의 이메일 주소를 인터넷에서 찾아서 연락했다.

“어떤 연유로 고인의 유품이 그 가게에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혹시라도 유족분들께서 원하시면 제가 구입해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2021년 12월31일 밤 이메일)

김 변호사는 변 하사의 부모님께 연락을 한 뒤 1월3일 ‘그 옷을 되찾을 수 있으면 고맙겠다’는 유족의 뜻을 박씨에게 전달했다. 박씨는 곧바로 가게로 달려가 변 하사의 군복을 샀다. 우리 돈으로 8천원이었다.

“태국에서는 트랜스젠더 등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사실 저는 성소수자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은 잘 알아요. 가까운 지인의 가족이 비슷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유족이 원한다면 옷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변 하사의 군복이 발견된 가게에서 남쪽으로 직진해 방콕 시내를 흐르는 짜오프라야강을 건너면 그가 성전환 수술을 받은 랏부라나 병원이 있다. 거리로는 약 20㎞, 빠른 길로 가면 자동차로 30분이면 닿는 거리다. 변 하사는 2019년 10월 말 부대 책임자인 여단장으로부터 성전환 수술을 위한 국외여행 허가서를 받아들고 이 병원에 도착해 다음날 수술을 마쳤다. 약 한달간 타이에 머물 때까지만 해도 변 하사는 희망에 차 있었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남성)과 본래의 성(여성)이 달라서 오는 ‘성별 위화감’(디스포리아)이 사라진데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전차 조종수로 원대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은 원대 복귀는커녕 그를 아예 군 밖으로 쫓아냈다. ‘변 하사와 계속 근무하고 싶다’는 군단장과 대대장 등 변 하사 직속 상관들의 의견 제시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는 이듬해인 2020년 1월22일 전역심사위원회를 열어 고환 결손 등 신체장애 3급이라면서 강제 전역 조처를 내렸다.

충북 청주에서 나고 자란 변 하사는 부모와 중학교 선생님의 만류에도 전남 장성에 있는 군하사관 양성 특성화고를 자원했을 정도로 군을 사랑했다. 전차 조종수 평가에서 A등급을 받고, 공군이 주최하는 유시시(UCC) 공모전에서는 공군참모총장상을 받기도 하는 등 업무 성적도 뛰어났다. 4년간의 의무 복무 뒤에는 장기 복무를 신청할 계획이었다.

군이 자신을 내쳤지만, 변 하사는 “기갑의 돌파력으로 그런 차별을 없애버릴 수 있다”(<한겨레> 인터뷰, 2020년 3월20일)고 밝혔다. 그는 실제로 군의 부당한 조처에 당당히 맞서 싸웠다. 군 인사소청심사위원회에 제기했던 전역 취소 요구가 기각되자(2020년 6월29일), 그해 8월에는 대전지방법원에 ‘전역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하지만 재판은 한번도 열리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 군 복귀를 희망해온 변 하사의 심정은 그만큼 타들어갔다. 군에 있었더라면 전역하는 날짜인 2021년 2월28일을 하루 앞둔 27일 오후 5~9시(경찰의 추정 시각) 변 하사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부모가 재판을 이어받고서야 재판이 열렸으며, 2021년 10월 법원은 ‘전역심사 당시 군이 변 전 하사의 성별이 명백히 여성이었던 만큼 남성으로 간주하고 장애가 있다고 본 것은 잘못’이라며 뒤늦게 변 하사의 손을 들어줬다.

고 변희수 하사가 2020년 1월22일 강제 전역 조처가 내려진 직후 군인권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군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고 변희수 하사가 2020년 1월22일 강제 전역 조처가 내려진 직후 군인권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군인으로 계속 남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대행업체-중고 수출업체 거쳐 넘어간 듯

변 하사가 명예를 회복할 때쯤 그가 즐겨 입었던 군복은 저 홀로 방콕에 나타났다. 그가 ‘자신의 성’을 찾아서 행복해했던 도시였다.

“변 하사가 떠난 뒤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서 유품 정리를 대행업체에 맡겼다고 해요. 그때 아마 버리기 아까운 옷가지들이 중고 의류 수출업체를 통해 태국으로 간 것 같아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장소인 방콕에 갔다가, 자신의 죽음이 순직으로 인정되는지 여부가 주목되는 시점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우연치고는 참 묘하죠.”(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 지난 22일 통화)

유가족의 뜻에 따라 군인권센터는 변희수 군복을 앞으로 추모사업에 활용할 예정이다. 변희수 군복은 단순한 상징성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며 실명을 밝히기를 거절한 박씨는 옷을 산 날 김 변호사에게 보낸 이메일에 이렇게 썼다.

“최근에 저 가게 앞에 주차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날 생각지도 못하게 야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예사롭지 않은 인연일 거라 믿고, 저 역시 편견 없이 세상을 보고, 어려운 분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겠습니다.”(지난 1월3일 이메일)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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