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21일 오후 추모객들이 방문해 고인에게 묵념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정작 지식의 힘이 필요한 곳에서 지식인을 찾기 어려운 시대다. 살아가면서 서럽고 억울하고 답답한 현실에 직면할 때, 돈과 권력이 있는 이들에게 속지 않으려고 할 때 약자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지식이라는 방패를 원한다. 일찍이 경제학자 조안 로빈슨도 “경제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속지 않고 경제 현실과 사회 현실을 약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줄 경제학자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시대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자유로운 지식인 정태인이 더 그립다. 화려한 이론보다 보통사람들이 맨눈으로 보는 세상에 더 믿음을 주었던 지식인, 학자보다는 현실을 바꿀 정책가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소개했던 지식인, 사람들은 그저 경제학자라고 부르지만 ‘현실이 필요로하는 주제’라면 기꺼이 새로 배우고 탐구하려 했던 진정한 연구자, “쿠데타가 불가능한 시대는 혁명도 불가능한 시대”라면서 변함없이 현실적인 입장을 지켰지만, 그 많던 진보 지식인들이 어느 사이 오른쪽으로 몰려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장 왼쪽에 서게 된 지식인, 그래서 더는 혁명을 얘기하지 않는 지독히 불평등한 시대에 홀로 ‘혁명’이라는 옛 금기어를 다시 꺼내 들어야 했던 이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선생님 정태인이다.
특히 많은 기성세대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과거를 해석하는 데 정열을 쏟는 동안, 결국 자신이 살아갈 시간들도 아니게 된 미래를 고민하고 미래세대의 삶에 도움이 될 지식과 정책을 투병 기간에조차 몰두했던 지식인 정태인이 아마 가장 내 기억 속에 오래 머무를 것 같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21일 오후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찾아와 분향을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그는 나와 함께 일했던 내내 늘 반발쯤 앞서 시민들의 요구를 선취(先取)하려는 노력을 쉬어본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의 공식 정책이기도 했던 ‘소득주도 성장론’을 우리 사회에 최초로 공론장에 올려 새로운 경제개혁정책 토론의 불씨를 만들던 것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대한민국 어느 대학에서도 사회적 경제를 가르치지 않던 시절부터, “정태인은 수익추구에만 전념하는 시장경제 안에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가 자라나는 한국경제의 미래를 꿈꿨다.”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고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화두를 담은 그의 책 <협동의 경제학>은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공동체 경제를 고민하던 많은 활동가나 기업가들에게 교과서가 되었다. 전국 곳곳의 시민사회나 지역 공동체에서 부르면 그는 직접 발품을 팔아 달려가서 강의를 하고 토론도 했다. 사회적 경제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치고 한 두 번 그의 강의를 듣지 않은 분들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그는 대학이 아니라 대한민국 삶의 곳곳을 강단으로 삼았다.
우리 사회에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자는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정태인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지구 한계 안에서 경제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생태경제학을 탐구했다. 2013년에 쓴 책 <협동의 경제학> 맨 마지막 장 제목은 “경제도 결국 자연 속에 존재한다”이다. 그는 “생태 문제는 기존의 진보적 의제에 단지 의제 하나를 더 추가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생태 문제는 이제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의제라고 할 수 있다”면서 다가올 기후위기를 예감했다. 2019년 기후위기 이슈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우리 사회에서 그린뉴딜 정책논의가 막 시작되던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갖고 정책에 뛰어든 매우 드문 경제학자가 정태인이었던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미래 의제만 파고든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살아갈 세대들에게 마음과 시간과 열정을 내서 당사자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청해 청년 정치인들에게 함께 경제 스터디 모임을 열었던 드문 사람 중에도 어김없이 정태인이 있었다. 자신이 속했던 민주화 세대의 실패를 기꺼이 인정했기에 더 미래세대를 위한 의무를 무겁게 생각했던 지식인 정태인, 그래서 미래의 시간들이 오늘이 되는 순간순간마다 그가 일러준 지혜와 열정에 찬 그의 모습이 여러 번 생각날 것 같다.
김병권 독립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