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KBS) 진실과미래위원회가 공개한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2008년 작성 문건.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8월, 정연주 <한국방송>(KBS) 강제 해임 뒤 새 사장을 선임하는 전 과정에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보여주는 이른바 ‘영포빌딩 문건’이 공개됐다. 당시 청와대 개입 의혹에 대해선 관련자들 증언은 있었지만 정부 문건 확인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방송의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는 8일 “2008년 9월17일 시행된 인사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2008년 청와대 정무수석실, 대변인실, 국정조사 상황실 등에서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건 18건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진미위는 한국방송이 이명박·박근혜 전 정권에 빚어졌던 불공정 보도, 제작 자율성 침해 등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기구다. 이들이 공개한 문건은 검찰이 지난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유한 영포빌딩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것으로, 정무수석실이 2008년 8월 18일과 25일 대통령 정무수석실이 작성한 내용이다.
8월 18일 보고된 ‘주간동향 및 분석’에 따르면 이명박 대선후보의 언론특보였던 김인규씨를 한국방송 사장에 임명할 경우 친정권 이미지가 강해 논란이 예상되고 국정운영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며 ‘한국방송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방송 전문가로 조직 장악력이 있는 비정파적 인사를 물색’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시했다. 김 특보를 발탁하면 ‘정연주 해임=대통령 측근 심기=방송장악 음모’라는 등식이 성립하여 역풍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었다.
이 문건이 보고되기 하루 전인 2008년 8월17일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유재천 한국방송 이사장이 한국방송 사장 후보자들과 만나 사실상 사장 후보자 면접을 하는 자리인 이른바 ‘8.17 대책회의’는 이미 <경향신문> 보도(2008년 8월22일)를 통해 보도된 바 있다. 모임 이틀 뒤인 8월19일 김인규씨가 사장 응모 포기 성명을 발표했고, 유력 후보로 꼽히던 김은구 전 한국방송 이사도 대책회의에 참석한 사실이 밝혀져 낙마했다.
또 다른 문건인 8월 25일 보고된 '주간 정국분석 및 전망' 문건은 8.17 대책회의 폭로에 대한 청와대·여당 대응과 한국방송 안팎의 반응을 담고 있다. 문건은 "한국방송 보도 태도를 보면, 정연주 사퇴 이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건이 보고된 이튿날인 8월26일 한국방송 이사회는 이병순 전 한국방송 뉴미디어본부장을 새 사장으로 선임했다.
진미위는 "두 문건의 내용으로 볼 때 사장 후보자 김은구 후보 내정→김인규 사장 응모 포기→특정인 사장 선임 과정을 청와대가 기획했고, 실제로 그대로 실행이 됐음이 확인된다"며 "특히 김인규씨가 갑작스럽게 사장 응모 포기 성명을 발표한 이유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고, 본인은 '혼란한 한국방송 사태의 장기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응모 포기를 결심'했다고 주장했으나 사전에 청와대의 지시 내지 교감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고 짚었다. 엠비맨이었던 김인규씨는 이병순 사장이 정연주 사장의 잔여 임기를 마친 2009년 11월에 결국 한국방송 사장을 꿰차 친정권 방송을 만든 바 있다.
진미위는 이와 함께 “이병순 전 사장 취임 뒤 단행된 인사가 상당 부분 보복인사였다는 정황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9월 17일 인사발령자 95명 가운데 52명(54.7%)이 정연주 사장 해임에 반대하던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한국방송 사원행동'(사원행동) 가입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사원행동 대표였던 양승동 피디(현 사장) 등은 비제작부서로 쫓겨났고, 김용진 탐사보도팀장(현 <뉴스타파> 대표)은 부산총국으로 발령나는 등 탐사보도팀 기자 6명이 모두 타 부서로 전출됨에 따라 탐사보도팀은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진미위는 "'9.17 인사' 이후 한국방송에서는 탐사보도팀 해체뿐 아니라 비판적 시사프로그램인 <미디어포커스>와 <시사투나잇>이 폐지됐으며 윤도현, 정관용, 진중권, 유창선 등 진행자들이 대거 하차하는 '블랙리스트' 사태가 빚어졌다"고 지적했다.
문현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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