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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월간 ‘말’ 창간…마포서 연행돼 29일 구류 / 이룰태림

등록 2014-05-11 19:23수정 2018-05-10 13:48

1985년 6월15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시사월간지 <말> 창간호 3천부를 무사히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그해 7월1일 민언협 사무국장이자 <말>지 편집인으로서 마포경찰서에 연행돼 구금된 필자(성유보)를 신홍범(오른쪽부터)·정상모씨 등 언협 회원들이 면회하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5년 6월15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시사월간지 <말> 창간호 3천부를 무사히 발행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그해 7월1일 민언협 사무국장이자 <말>지 편집인으로서 마포경찰서에 연행돼 구금된 필자(성유보)를 신홍범(오른쪽부터)·정상모씨 등 언협 회원들이 면회하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90)
1984년 12월 창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는 85년 1월 본격적 업무에 착수했다. 우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와 함께 3층짜리 건물의 15평쯤 되는 2층을 통째로 빌려 반반 나누어 쓰기로 했다. 위치는 마포경찰서 맞은편 골목이었으니 ‘등잔 밑’인 셈이었다.

1월 말 첫 실행위원회에서 세 가지 사항을 의결했다. 그 하나는 월간지를 창간, 그 둘은 각계 민주화운동과 적극 연대, 그 셋은 특히 문화예술단체들과 함께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건이 터지면 성명, 농성, 집회를 여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상설 민주화운동 단체로서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일단 해직기자가 아닌 젊은 시민회원 겸 상근 간사들을 뽑기로 했다. 고 김도연 실행위원이 간사로 맨 처음 추천한 사람이 최민희였다. 나는 최민희(국회의원·새정치민주연합)가 전두환 독재 초기 저 엄혹했던 82년 가을 이화여대에서 시위를 하다 감옥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면접을 한 뒤 실행위원회에 간사 임명을 제안했다. 그해 말 내가 사무국장을 그만둘 때까지 실무진으로 이화영, 정봉주(전 국회의원), 정수웅, 김원옥, 배시병 등을 선발했는데, 그때마다 고 김도연과 최민희의 추천을 존중했다.

실행위원회는 월간지 제호를 공모하고 2월 초순 제호 결정을 위한 논의를 했다. 고 송건호 의장께서 월간 <민주언론>을 제안했고, 많은 위원들은 월간 <민주통신>을 추천했다. 월간 <말>은 신홍범 위원의 아이디어였다. 사르트르의 소설 중에 <레모>(말)라는 작품이 있다면서, “말은 중립적이다. ‘민주’라는 제목이 들어가는 제호는 전두환 정권의 알레르기로 극심한 탄압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말>에 찬성했다. “독재는 주먹이 말하는 사회이고, 민주사회는 대화와 토론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회, 즉 말로 하는 사회”라고 늘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기자(記者)는 글로 말하는 자이고 방송인은 마이크를 통해 말하는 자 아닌가? 우리가 민주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주먹 사회가 아니라 말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소신이다.

<말>을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민언협은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금과 회비를 모아줘 출범하는 데 차질이 없었으나 월간지를 출간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다. 이를 두 곳에서 해결해 주었다.

기독교교회협의회의 고 김관석 목사가 700만원을 내놓았다. 당시 이 돈을 전달한 이부영이 “종로5가에서 보낸 돈이다”라고만 했고, 우리는 부러 더 알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조선투위의 고 백기범이었다. 그는 300만원을 내게 직접 건네주었다. 1천만원이면 최소한 3천부 발행 월간지 4~ 5회는 제작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럼 누가 편집책임을 맡을 것인가. 통상적으로 본다면 사무국장이 지휘를 해야 할 것이나, 당시 전두환 정권은 ‘제1호 감시 대상’ 송건호 의장과 더불어 사무국장인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터였다. 서울시경에서 ‘서판석’이라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형사가, 마포서에서 또 한 사람의 정보 형사가 주로 민언협을 담당했는데, 그 시절 보기 드문 신사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오전 10시쯤이면 사무실로 “문안인사”를 왔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래서 뭔가 ‘일’을 벌일 때일수록 사무국장인 나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종일 들어앉아 담배만 피워대며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필자(성유보)
필자(성유보)
우리는 고 김도연을 편집차장으로 임명해 ‘말’ 창간호 편집의 총책임을 맡기고, 실무 진행의 중심 간사로는 최민희를, 그리고 속성 기자교육은 현대경제연구소의 고 백기범을 비롯해 <경향신문> 해직 출신인 홍수원(<한겨레> 창간멤버), 박우정(전 <한겨레> 편집국장), 표완수(현 <시사 인> 사장)에게 부탁하고, 국제정치 관련 기사 해설도 그들에게 부탁했다.

공안당국의 감시를 피해 모든 편집 작업은 외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했다. 창간호 편집 작업은 동아투위 김태진 위원(출판사 다섯수레 사장)과, 조선투위의 성한표 위원(전 <한겨레> 부사장, 현 한겨레사우회 회장)의 집에서 교대로 이뤄졌다. 당시 잡지 편집은 컴퓨터 사식작업을 거쳐 편집자들이 이를 출판용 대장에 따붙이는 공정을 거쳐야 했다. 이를 ‘대지작업’이라 했는데, 나는 인쇄 과정에 압류당할 수도 있으므로 대지를 2부 만들도록 지시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천만다행이랄까! 마침내 6월 초순 우리가 영등포경찰서 부근의 한 인쇄소에서 ‘말’ 창간호를 자동차에 싣고 나오는 순간 경찰이 기다렸다는듯 검문을 해서는 3천부를 몽땅 압수해갔다. 우리는 곧바로 예비 대지를 고 강은기 세진인쇄 사장에게 맡겨, 1주일 만인 6월15일 창간호 3천부를 재발행했다.

고 김도연이 운영하던 공동체 출판사를 통해 서점가에 배포하자 ‘말’은 불티나게 팔렸다. 경찰은 서점에서 일제히 잡지를 압류하고, 창간호 편집인인 나를 마포경찰서로 연행해 즉결심판에 넘겨 29일간의 구류에 처했다. 그러나 민언협은 회원들, 민주화운동가들, 그리고 일부 현직 언론인들을 통해 비공식 유통망을 만들어 날로 인기를 더해갔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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