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12월29일 서울 분도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열린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집행부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고 김태홍·고 김인한 공동대표, 고 송건호 의장, 최장학·김승균 공동대표. 뒷줄 왼쪽부터 이호웅·이부영·윤활식·성한표·신홍범·박우정·노향기·고 김도연 실행위원.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7)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1984년 12월19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 ‘피정의 집’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대회에서 의장에 고 송건호 선생, 공동대표에 고 김인한 동아투위 위원장, 최장학 조선투위 위원장, 고 김태홍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80협의회) 회장, 김승균 인문사회과학서적 출판인모임 대표, 감사에는 이경일(경향신문), 고 나병식(풀빛출판사 대표)이 선임되었다. 실행위원으로는 동아투위에서 윤활식·이부영 위원을, 조선투위에서 신홍범·성한표 위원을, 80협의회에서 노향기(한국일보)·박우정(경향신문) 기자를, 출판계에서는 이호웅(형성사·국회의원 지냄), 고 김도연(공동체 출판사)을 보냈다. 나는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언협’ 논의는 84년 봄부터 시작됐다. 동아투위의 고 이병주 위원장과 이부영 위원 그리고 나, 조선투위의 최장학 위원장과 정태기·신홍범 위원, 80협의회의 김태홍 회장, 그리고 임재경 선생 등이 새로운 언론운동단체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70년대 이래 동아투위, 조선투위나 새로 출범한 80협의회는 해직자들끼리의 ‘갇힌 모임’인 만큼, 언론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뜻과 열정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단체’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몇 차례 준비모임을 통해 출판인들에게도 동참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해 12월10일 서울 인사동 음식점 경주집에서 발기인대회를 했다. 송건호 선생, 동아투위의 권근술·고 김인한·김종철·김태진·윤활식·이병주·이부영·이종욱(출판국 출신)·이태호·임채정·정동익 그리고 나, 조선투위의 성한표·신홍범·최장학, 80협의회의 이경일·김동호(중앙일보)·김태홍(합동통신)·노향기(한국일보)·정상모(문화방송)·현이섭(한국경제일보)·홍수원(경향신문), 사회과학서적 출판사 대표 나병식·김도연·김승균(일월서각)·이호웅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실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70년대부터 동아투위와 운동의 궤적을 같이해왔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71년 4월 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을 때와 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을 때 조선일보 기자들도 동시에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미 65년부터 사주가 일본 차관을 도입해 호텔업에 나서면서 상업주의에 물든 조선일보사는 기자들의 언론운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74년 12월17일 ‘유정회’ 국회의원 전재구(중앙정보부 출신)의 ‘유신 찬양’ 기고문을 실었다. 이에 분개한 신홍범(외신부) 기자와 고 백기범 기자가 김용원 편집국장에게 항의하자 이를 “방약무인의 언행”, “위계질서 위반”, “하극상”, “편집권 용훼” 등으로 몰아 두 기자를 파면했다. 100여명의 기자들이 항의농성을 벌이자 조선일보사는 당시 편집부국장 고 김윤환(노태우·김영삼 정권 시절 정무수석, 국회의원)을 내세워 창간 55돌 기념일인 75년 3월5일까지 복직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기자들은 “단결만이 언론자유운동의 지름길”이라고 판단, 75년 1월11일 ‘기협 조일분회’ 총회를 열고 정태기 기자를 새 분회장으로 뽑아 개편했다. <조일분회 소식>을 창간해 ‘2호’까지 발간하자 조선일보사는 75년 2월11일 정 위원장을 일단 조사부로 전보시켰다. 물론 백·신 두 기자의 복귀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3월6일 <소식 3호>를 발간하고 농성에 들어가자 회사는 정 위원장, 김유원 부위원장, 성한표 보도자유부장, 최병선 총무부장, 심채진 기자 등을 파면했다. 기자들은 제1차 임시집행부를 구성해 대응했고, 회사는 3월10일 김명규·최준명·박세원·임희순·이상현 등 집행부 간부들을 해고했다. 이어 3월11일에는 농성에 합류한 이종구(정치부) 차장을 비롯해 박범진·최장학·김유원 기자 등 4명은 파면하고, 제2차 임시집행부 등 37명을 무기정직시켜 농성자 전원을 회사에서 몰아냈다. 이 가운데 32명은 3월21일 조선투위를 결성하고 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중반까지 언협 결성, <말> 창간, <한겨레신문> 창간에 이르기까지 언론자유운동에 헌신했다.
84년 봄 출범한 80협의회는 김태홍·정남기·노향기·정상모·전진우·김동호·최형민·정연수·이원섭·윤덕한·박우정·박성득·홍수원·이경일·표완수·고승우·정동채·백맹종·현이섭·이영일·왕길남·김상기·이희찬 등 비교적 젊은 연배여서 언협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언협은 창립 선언문에서 “강제된 힘으로 국민의 의사를 지배하려는 것이 폭력인데, 제도언론은 가장 큰 정신적인 폭력범”이라고 규정하고, “이 언론 부재의 캄캄한 암흑기를 언협이 선두에 서서 밝혀 나가자”고 다짐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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