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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암흑기 언론’ 덮어두고 번역 매달리자니… /이룰태림

등록 2014-05-01 19:06수정 2018-05-10 13:46

1984년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열기가 분출하며 운동단체가 속속 생겨났고, 필자는 84년 12월 창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비롯해 여러 단체의 실무 활동가로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85년 2월1일 민언협 마포 사무실 입주식에서 송건호 의장(왼쪽)이 축하 방문한 이태영 가정법률상담소장(오른쪽)을 맞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4년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열기가 분출하며 운동단체가 속속 생겨났고, 필자는 84년 12월 창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비롯해 여러 단체의 실무 활동가로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85년 2월1일 민언협 마포 사무실 입주식에서 송건호 의장(왼쪽)이 축하 방문한 이태영 가정법률상담소장(오른쪽)을 맞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6)
1984년은 지식인 사회, 지역사회, 정치권의 민주화운동이 한꺼번에 폭발한 해였다. 우선 3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가 결성되었다. 4월에는 문화예술계가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출범시켰다. 5월에는 김대중·김영삼 ‘양 김씨’가 손잡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었다. 6월에는 12개 단체(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인천지역 사회선교협의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기독교학생운동연합(KSCF), 민청련, 한노협, 민중문화운동협의회,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가 참여한 가운데 민중민주운동협의회가 출범했다. 8월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10월 재야 원로까지 참여한 민주통일국민회의, 11월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이 속속 꾸려졌다. 12월19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가 재출범하고,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결성되었다.

전두환 독재의 ‘1984년’은 박정희 시대 ‘1974년’을 연상시킨다. 박정희 정권은 74년 긴급조치 1·2·4호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오히려 정의구현사제단과 자실이 생겨났고, 언론계에서는 전례없는 언론자유운동이 일어나 박 정권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84년에도 지난 3년간 움츠러들기만 하던 민주화운동의 에너지가 동시에 폭발했다. 적어도 84~85년 2년간은 민주화운동 단체들에 의해 그동안 제도언론에서 외면하고 묵살해왔던 민중의 실상이 알려지고,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 진입했다. 독재체제의 가장 큰 폐해인 정보 독점과 통제가 먹히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우선 자기 영역의 실태를 파악하고, 성명과 집회, 기관지들을 통해 널리 알리고, 상황들을 서로 나누게 되었다.

84년 당시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기관지를 살펴보면 가톨릭농민회(회장 서경원)는 <농민의 소리>를, 가톨릭노동사목협의회(회장 윤순녀)는 <노동하는 인간>을, 한노협(이사장 지학순, 부이사장 박형규, 위원장 방용석)은 <민주노동>을, 민중문화운동협의회(실행위원 송기숙 황석영 김종철 허병섭 여익구 호인수 김학민 최민화 채광석)는 <민중문화>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상임대표 박태순 양성우 이문구 조태일 황석영)는 <민족문학>을, 민청련(의장 김근태, 부의장 장영달)은 <민주화의 길>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의장 제정구)은 <노동자의 벗>과 <인천의 소리>를, 민주운동협의회(공동대표 김승훈 김동완 이부영)는 <민중의 소리>를, 민주통일국민회의(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 백기완)는 <민주통일>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민언협(의장 송건호, 공동대표 김인한 최장학 김태홍 김승균)도 85년 6월 <말>을 창간했다. 갓 생겨난 수많은 운동단체들은 70년대와 달리 ‘민중’과 ‘민중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단체들의 기관지 이름에도 ‘민중’이 들어간 제목이 많았다. 문동환 목사와 고 안병무 박사가 지적했듯이 “민중이란 핍박받는 자들 중에서 저항할 의지와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저항하는 백성”이 개신교 ‘민중신학’의 요체라 할 것이다. 민중들은 그들이 독재권력으로부터 핍박당할 때, 일단은 그들의 처지와 고통을 하소연할 메시아적 존재를 찾아보지만 메시아가 그리 흔한가? 결국에는 민중 스스로가 해답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이처럼 민중민주주의 운동이 새롭게 폭발하던 시기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가장의 책임에서 면제되는 기회를 얻었다.

사실 75년 동아일보사로부터 해직된 동아투위 위원 대부분이 그랬듯이 나 역시 아내와 두 아들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이었다. 70년대 두 차례나 감옥을 갔을 때는 각계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중·고교 친구들, 지인들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79년 말 두번째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는 고 이태영 변호사가 <가정법률상담소 25년사>의 편집을 맡겨주었고, 81년에는 권호경 목사가 사회선교협의회의 자문역으로 선임해줘 2년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래도 생계는 늘 불안정했다.

그래서 나는 81년 여름부터 83년 봄까지 약 2년간 동아투위 위원이자 한길사 사장인 김언호가 부탁한 번역작업에 매달렸다. 미국의 조지 세이빈이 지은 <정치사상사>는 마침 필자가 대학 다닐 때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과장이었던 고 민병태 교수가 열강하던 책이었다. 차남희 교수와 공역한 이 책은 83년 출판되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하지만 동아일보사 기자 시절부터 언론자유운동과 나라의 민주화에 전심전력하겠다고 결심했던 나로서는, 그 당시보다 더 암흑기를 맞은 한국 언론의 현실을 덮어두고 번역에 매달리고 있자니 좀이 쑤셨다. 이를 보다 못한 집사람이 83년부터 웅진출판사의 외판사원으로 나섰다. 그 덕분에 나는 84년부터 생계 책임에서 자유롭게 되었고, 민중민주운동협의회에서 중앙위원을, 민주통일국민회의에서 집행위원을, 그리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서 사무국장을 맡을 수 있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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