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신군부의 공포정치에 거의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은 초토화되거나 침묵을 지켜야 했으나 농민운동은 꺾이지 않았다. 사진은 82년 3월 출범한 ‘기독교농민회’의 86년 연합회 정기총회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3)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기성세대의 민주화운동은 ‘일패도지’했다. 정치권을 보면, 윤보선은 “반체제 인사와의 대화를 통해 사회안정에 기여하겠다”고 정권에 응답했고, 김대중은 감옥에 갇혔으며, 김영삼은 “정계은퇴 심경에 변함이 없다”고 했으며, 김종필은 “해야 할 분(전두환을 지칭)이 잘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철승은 “광주사태가 전주까지 번지지 않도록 한 나를 정부가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불만을 터뜨렸다.(김삼웅, ‘정치지도자들의 정세인식’, <1980년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재야세력도, 종교계 지도자들도 상당기간 정권에 대한 저항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침묵의 시대’에 나름의 생존권 투쟁과 민주화 투쟁을 꾸준히 전개한 세력은 농민운동이었다. 기존 가톨릭농민회에 더하여 82년 3월 ‘기독교농민회’까지 출범했다. ‘가농’과 ‘기농’은 82년 봄부터 ‘농지세 시정 투쟁’에 손잡고 나섰다.
가농의 정성헌·정재돈은 말했다. “농지세는 도시근로자의 근로소득세에 해당되는 것으로, 농가의 순소득에서 평균생활비를 보장하는 기초공제액을 빼고 부과해야 함에도 공무원이 임의로 부과해왔고, 기초공제액도 도시근로자에 비해 낮았다. 80년 음성지역 고추 재배 농민들이 부당농지세 시정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농지세 자진신고 및 이의신청 활동을 하면서 농지세 납부 거부 투쟁을 전개했다. 전두환 정권은 강제차압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가농과 기농을 통해 전국적 서명운동과 집회로 계속 이어지자, 결국 84년 농지세법을 개정했다.”(‘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6월항쟁을 기록하다>(제1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가농과 기농은 83년 여름부터 ‘농협조합장 직선제 100만 서명운동’을 벌였다. 농업협동조합은 ‘5·16 쿠데타’ 이후 ‘농협 임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통해 임명제로 바뀌었다. 일부 학자들은 “박정희 시대 관제화된 농협은 독점자본을 위해 농민을 수탈하는 파이프라인이 되었다”고 지적했다. 두 단체의 서명운동은 전두환 정권이 촉발한 것이었다. 정권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미국산 쌀을 83년 22만t, 84년 25만t 수입했다. 쌀값이 폭락했을 뿐 아니라, 농협에서 미국산 수입쌀을 팔고 우리 농가의 쌀 수매량은 대폭 줄이는 바람에 농민들은 쌀을 내다 팔 수조차 없게 되었다. “농협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한 단체인가?”라는 분노가 폭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농촌의 붕괴는 박정희 시대 이래 저임금 저농산물가격 정책으로 20년간 진행중이었다. 65년 1580만명이던 농가인구가 85년에는 850만명으로 줄어든 사실이나, 65년 94%이던 식량자급률이 85년에는 48%로 떨어진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전두환 정권은 “개방농정”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두 단체는 농협의 반농민정책에 저항해 83년 여름 ‘농협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농협을 농민의 품으로”라는 구호와 함께 8월1일부터 각 도 연합회별로 농협조합장 직선제를 위한 100만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특히 교회와 교회단체들의 적극적 동참과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서울 명동 천주교회에서는 하루에만 3000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 직선제 서명운동이 대통령 직선제 요구로 번질까봐 특히 신경을 썼다. 방해 공작도 다양했다. 농협 직원, 면사무소 직원, 경찰이 마을에 상주하면서 농민회 회원들을 감시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장회의, 동장회의, 반상회가 총동원됐다. 전남 무안의 직원들은 “농민회 활동자금이 소련에서 조달되고 있다”, 화순에서는 “농민회 활동자금이 미국의 용공단체에서 나오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어느 농촌지도소에서는 “서명운동에 참가하면 영농후계자 자금을 못 받을 줄 알라”고 위협했다. 강원 홍천에서는 면장이 “도산(도시산업선교)은 깨버렸는데, 도산 잔당이 가톨릭농민회에 침투해 선동을 획책한다”고 모함했다. 충북 영동과 청원에서는 농협 관계자가 한국전쟁 때의 보도연맹 운운하며 서명하지 말라고 위협했다. 충북 음성에서는 지서장이 “가톨릭농민회 활동하면 친척이나 자식이 취직 못한다, 서명에 참여하면 새마을 지원 자금을 회수하겠다”고 협박했다.
가농은 83년 12월23일 서울 전진상교육관에서 농민대표 8명과 각 정당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정당 대표들은 원칙적으로 농협민주화에 동의하고 조합장 직선제 실시를 위한 제도 개선에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농협조합장 직선운동은 ‘저항’이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 주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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