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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독재 사병노릇 싫어 데모하고 감옥으로 / 이룰태림

등록 2014-04-24 19:13수정 2018-05-10 13:44

1980년 9월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전두환 정권은 군사독재 이미지를 탈색시키고자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문화행사를 자주 기획했다. 사진은 81년 5월28일부터 나흘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전국의 대학생 수만명을 동원한 가운데 열린 ‘국풍 81’ 장면으로, 서울대생이 무대를 기습해 무산시키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9월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전두환 정권은 군사독재 이미지를 탈색시키고자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문화행사를 자주 기획했다. 사진은 81년 5월28일부터 나흘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전국의 대학생 수만명을 동원한 가운데 열린 ‘국풍 81’ 장면으로, 서울대생이 무대를 기습해 무산시키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1)
1980년 대학생으로서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과 제5공화국 집권을 겪어야 했던 세대들에게 ‘민주화운동’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이화여대 윤영순은 훗날 “전두환 시대에 살면서 운동 이외의 선택이란 비굴함과 굴종의 또 다른 표현이며”, “우리 젊은이들조차 시대의 모순을 외면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믿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고려대 여학생 김혜영과 이희경은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기 앞서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시위 주동을 했고, 성철준·박윤길·송재석·김덕균·김헌·양동주 등은 “전두환 독재의 사병 노릇을 해야 하는 군인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디(데모)를 치고 감옥에 갔다”고 말했다.

그 시기 시위의 양상은 60년대 후반 우리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캠퍼스 곳곳에 경찰이 깔려 있어 학생들은 모일 수조차 없었던 까닭에, 주동자 한두명이 건물 옥상이나 난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뿌리는 사이 아래쪽에서 다른 학생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일종의 ‘시간차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주동 학생들이 추락하거나 투신해 다치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두차례 옥살이 이후 모든 사회활동의 길이 막혀 그즈음 ‘낭인’ 신세였던 내게 젊은 학생들의 목숨 건 투쟁 소식은 ‘뭔가 해야 한다’는 채찍으로 다가오곤 했다.

81년 첫 시위는 3월19일과 4월14일 서울대의 유기홍·박태견·이주로·강석령·문용식 등이 잇따라 터뜨렸다. 5월29일에는 이화여대의 우명숙·황말희가 “축제 거부”를 주장하며 데모를 벌였고, 뒤이어 6월1~2일 조기숙·김정신은 침묵시위를 벌였다.

성균관대의 김현국은 10월7일 대학본부 굴뚝에 올라가 메가폰으로 외쳤다.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을 처단하라!” 그 아래에서 학생들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1시간 반 동안 시위를 벌였다. 김현국은 출소 뒤 어머니로부터 “그날 경영학과 교수라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학교로 달려갔는데, 조아무개 교수가 아들을 설득하라고 종용하길래, ‘나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아들은 잘 안다. 아들이 결단하고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다. 내가 모습을 보이면 우리 아들이 뛰어내릴지도 모른다’며 거부했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누가 진짜 스승인가?

81년 5월에는 ‘언론 통폐합’의 주모자 허문도(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가 대학생 수천명을 동원해 벌인 이른바 ‘국풍 81’이란 해괴한 쇼가 서울대 시위를 유발시켰다. 김상준은 “81년 당시 우리는 늘 우울했다. 사랑했던 선배들, 친구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고, ‘짭새’(사복형사)들이 학교 벤치마다 새까맣게 내려앉아 있었다. 캠퍼스는 전쟁터였다. 그런데 허문도가 5월28월 ‘국풍’을 열자, 학생들의 꼭지가 돌았다. 여의도로 몰려가 단상의 밴드가 드럼을 두드리는 것을 신호로 우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파티는 순식간에 끝났고, 그날의 투쟁은 대승리였다”고 말했다.

고려대와 외국어대 학생들은 81년 11월8일 경기도 광주 ‘문무대’ 군사교육 때 입소 첫날 연병장에서 스크럼을 짜고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라는 노래를 합창하며 일종의 ‘사보타주’를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결국 수십명을 제적시키고, 고대생 109명과 외대생 50명을 강제징집했다.

서울대 공대는 82년 2학기 데모를 단단히 준비했다. 거사일은 9월16일, 주동자는 무려 7명(이재철·김학린·김영호·송호진·김중현·노정래·정승일)이었다. 9월15일 아크로폴리스에서 서울대 전체 총회를 한 뒤, 16일 낮 김영호·송호진 등이 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경협저지, 왜곡시정, 일제타도” 펼침막을 내걸고 유인물 2500장을 뿌렸다. 학생 1천명이 오후 5시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들은 “9월24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모이자”고 선언했고, 이에 호응해 9월17일 동국대, 9월21일 연세대, 9월22일 성균관대·단국대·이화여대 등 서울시내 16개 대학이 릴레이 시위에 나섰고, 9월24일 오후 1시부터 서울시내 곳곳에서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전남대에서는 ‘80년 5월’ 총학생회장이었던 고 박관현 열사가 40일간의 단식 끝에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자 80년 10월13일 박현주 주도로 추모시위가 열려 2천여명의 학생들이 3시간 넘게 교내시위를 벌였고, 10월24일부터 1주일간 추모행사를 벌였다. 경북대에서는 ‘전두환 독재 규탄’ 유인물을 뿌려 무려 18명이 구속된 데 이어 82년 11월18일 권형우·이병술이 시위를 주도해 2천여명이 동참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83년 들어서도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됐다. 한국외대의 이경옥은 9월15일 김경숙과 함께 두번째 시위를 벌이다 도서관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송세언도 “강집 당했던 최은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9월28일 이미숙·민혜홍·이선희·오길숙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외국어대 정봉주도 같은 날 장시간 1인시위를 주도했다. 11월8일에는 서울대의 황정하가 도서관 난간에서 밧줄 시위 중 추락해 사망했다.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 직전이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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