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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동맥 자해’ ‘무림사건’…부활하는 학생운동 / 이룰태림

등록 2014-04-23 19:18수정 2018-05-10 13:44

1980년 9월 들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수많은 반민주 악법을 양산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사진은 이른바 ‘무림사건’의 예고편으로, 서울대 학내 유인물 배포 사건을 보도한 80년 12월13일치 <동아일보> 사회면.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9월 들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통해 수많은 반민주 악법을 양산해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사진은 이른바 ‘무림사건’의 예고편으로, 서울대 학내 유인물 배포 사건을 보도한 80년 12월13일치 <동아일보> 사회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80)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그해 연말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시켰다. 국회를 해산하고 국무회의를 통해 임의로 입법기관을 만든 것이다. 이를 통해 ‘언론기본법’과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언론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철저히 폐기처분했을 뿐 아니라 ‘집시법’, ‘국가보안법’, ‘노동관계법’ 등을 개악해 표현의 자유, 집회 시위의 자유를 유린했다.

전두환 시대 집시법은 ‘집회 시위 허가제’였고, ‘민주화를 주장하는 집회 시위에 대한 금지법’이었다. 그나마 해가 떠 있을 때만 집회 시위가 허가되었다. “재판에 영향을 미칠 염려가 있거나 미치게 하기 위한 집회 또는 시위,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에 관한 단속규정에 위반하거나 위반할 우려가 있는 집회 또는 시위,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 및 시위 등은 금지된다”고 규정했다. “금지된 시위를 예비음모해도 처벌한다”고 못박았다. ‘집회 및 시위 허가권’은 경찰서장 또는 경찰국장에게 있었다.

이처럼 전두환 시대는 국민 전체에는 암흑기, 민주화운동 세력, 특히 학생운동 세력에게는 죽음과 고문과 용공조작의 시대, 노동자·농민·빈민 등 “생존선상에서 생활선상으로 상승하려는 서민들에게는 공권력이 가장 먼저 진로를 가로막는” 파시즘 시대였다. 전두환 시대는 총체적으로 가장 저열한 ‘야만의 시대’였다. “민주화운동가는 곧 범죄인”이었고, 전국 곳곳에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한탄의 한숨만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학생운동권에서 가장 먼저 ‘정중동’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은밀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80~83년 학생운동에 대한 거의 유일한 기록은 ‘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 기념문집 출간위원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발간한 <5월 광주를 넘어 6월항쟁까지>(자인출판사·2006)가 아닐까 싶다. 이를 보면, 이 시기 학생운동은 가장 엄혹한 시기에 한국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되살렸으나, 성과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고 당사자들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전두환은 ‘5·17 쿠데타’ 직후 대학 안에 진주시킨 군대와 전경들, 그리고 정보과 형사들과 정보원들을 83년 말까지 계속 잔류시켰다. 그들은 마치 학원의 주인인 양 활개를 치며 수업까지 감시했다.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허무주의자가 되어 술독에 빠졌고, 학내 시위는 대부분 초동 진압되었다. 오죽했으면 이화여대생 윤영순(정외과 81)이 ‘이대가 남녀공학(?)이었던 것을 기억하나요’라는 기고에서 “나는 대학 3년을 항상 짭새(?)들과 함께하는 남녀공학 아닌 남녀공학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인 80년 9월9일 경희대 여학생 김경(영어교육학과 78)이 손목 동맥을 면도칼로 자해하면서 “살인마 전두환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자”고 외쳐 학생운동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시위를 기획한 이상희·하석태·정해랑·최낙범·김재관과 시위에 앞장선 정형서·박병식, 이를 도와준 강신홍·이효인 등은 모두 구속되었다. 이어 10월17일에는 고려대생 도천수·김관희·최봉영·이상진·박구진·전성·박민서·이상민·박선오 등이 “파쇼 타도”, “광주학살 원흉 처단”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였다. 5공화국 정권은 당장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렸다.

서울대에서는 이른바 ‘무림사건’이 터졌다. 12월11일 낮 김희경·남명수·남충희·윤형기 등이 도서관 앞에서 데모를 벌였다. 이들은 ‘반파쇼 학우 투쟁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운동은 이제 소모적인 시위 만능주의를 배격하고 기층 민중운동으로의 이전에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회나 시위보다는 노동운동과의 연계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공안당국은 이 데모의 배후를 캔다며 졸업생부터 재학생, 군 복무자에 이르기까지 100여명을 보안사,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시경 남산 대공분실 등으로 끌어다놓고 고문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전두환 정권은 애초 이 사건을 경제학과 71학번인 고 김병곤을 정점으로 79학번까지 엮어 대규모 반국가단체 조직사건으로 조작하려다 중단했다. 공안당국은 ‘연합 언더조직’이어서 안개처럼 실체를 알 수 없다는 뜻에서 “무림(霧林)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건이라고 자인한 셈이었다. 하지만 고세현·김명인·김희경·남명수·남충희·박용훈·윤형기·허헌중·현무환·이원주·최영선 등 11명을 구속하고 수십명을 강제 징집해 군대로 끌고 갔다.

80년 가을학기 학생 시위는 그 자체로는 큰 파장을 못 일으켰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초토화됐던 학생운동이 신속하게 복원된 증거로서 민주화운동 세력을 크게 고무시켰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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