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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전두환 정권, 검열 거부 기자들 잡아들여 / 이룰태림

등록 2014-04-21 19:10수정 2018-05-10 13:43

1980년 ‘5·17 쿠데타’에 앞서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 탈취 계획을 추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함으로써 국가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사진은 88년 12월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전두환 사령관이 중정 서리 겸직을 자청했다’고 증언한 내용.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7 쿠데타’에 앞서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권 탈취 계획을 추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도 겸직함으로써 국가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사진은 88년 12월 국회 5공 청문회에 출석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가 ‘전두환 사령관이 중정 서리 겸직을 자청했다’고 증언한 내용.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8)
불법 집권한 독재자는 국가정보의 독점과 언론 장악부터 시도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개월에 걸쳐 군부를 ‘하나회’ 중심으로 재편한 뒤 ‘허수아비’ 대통령 최규하에게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80년 4월14일자로 그는 보안사와 중정까지 모두 장악해냈다. 이후 군의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차지했다. 83년 이래 육군참모총장은 정호용·박희도·이종구·이진삼·김진영 등 한결같이 하나회 장군들이 맡았다. 국군보안사령관도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박준병·안필준·이종구·고명승·최평욱·조남풍·구창회·서완수 순으로 줄곧 하나회 장군들에게 돌아갔다.(‘1980년 신군부의 정치사회학-정치군벌 하나회의 정권찬탈 내란과정’, 김재홍,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토론회 <1980년 서울>에서)

80년 3월17일 기자협회는 고 김태홍(<합동통신> 출신·전 국회의원) 기자를 회장으로 뽑았다. 기협은 5월16일 회장단·운영위원·분회장 연석회의를 열어 “계엄당국의 보도 검열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며 언론계 내부에 아직껏 온존하고 있는 유신 잔재 및 그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는 다짐과 함께 “5월20일부터 검열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전면적 검열·제작거부 돌입 직전 ‘비상계엄’이 발동되는 바람에 김 회장은 도피를 하고 이수원 부회장 등 간부 6명은 구속되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는 6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1980년 언론과 언론인-광주항쟁과 기자들의 투쟁’, 고승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술토론회 <1980년 서울>에서)

그 첫째는 일선 기자들의 검열거부, 제작거부에 대한 당면 대책이었다. 중앙정보부가 마련한 대책에 따라 전두환은 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5월22일 언론사 발행인들을 만나 “국가적 위기 상황과 비상시국”에 대해 적극적 협조를 요구했다. 계엄사 보도처와 문화공보부는 각 사 편집·보도국장에게 계엄포고령 준수를 요구했다. 합동수사본부는 제작거부에 나선 언론인들, <경향신문>의 서동구 조사국장과 이경일 외신부장, 홍수원·박우정·표완수 외신부 기자, <문화방송> 노성대 부국장과 오효진 사회부 기자, <동아일보> 심송무 사회부 기자 등을 ‘계엄포고령 10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둘째 조처는 보안사가 주도한 ‘중진 언론인 접촉 순화계획’이었다. 국보위 분과위원장 11명, 합수부 처장 4명 등은 이 계획에 따라 중앙언론사 중진들 포섭에 나섰다.

셋째는 ‘문제 언론인 숙정’, 넷째는 ‘언론사 통폐합’이었다. 전두환은 80년 3월부터 자신의 심복인 보안사 준위 이상재를 계엄사 보도처에 파견하면서 ‘언론대책반’을 가동했다. 언론대책반은 “반체제 인사, 용공 또는 불순분자와 이들에 동조한 자, 검열거부 주동자 및 동조자, 부정축재자, 특정 정치인과 유착된 자” 등을 숙정 대상자로 지목했다. 당시 문공부 공보국장 이수정은 80년 해직기자가 모두 933명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인 강제해직 3개월 뒤인 80년 11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를 동원해 언론사들을 강제통합시켰다. 이에 따라 신문사 28개사 중 14개사, 방송사 29개사 중 27개사가 통합되었고 7개 통신사는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이라는 하나의 통신사로 합쳐졌다.

다섯째는 ‘언론기본법 제정’이었고, 여섯째는 문공부에 언론조정실이라는 신문·방송 통제본부를 설치한 것이었다. ‘언론기본법’은 한마디로 반민주 악법의 표본이다. ‘언기법’에는 주의 의무 조항, 책임 편집제 조항 등 권력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가 한둘이 아니었다. 특히 ‘제24조 문화공보부 장관이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하거나, 발행의 정지를 명할 수 있다’는 조항, ‘3조 4항 언론은 폭력행위 등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위법행위를 고무 찬양해서는 안 된다. 이를 반복해서 현저하게 위반할 때는 해당 언론사를 문공부가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는 조항 등은 일개 문공부 장관에게 신문·방송의 생살여탈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21조’에는 신문을 발행하려는 자에게 막대한 시설투자를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재벌급 자산가만이 신문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적 소통의 기회 균등을 파괴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아니나 다를까. 전두환 정권은 ‘언론기본법’이 발동되자마자 문공부에 홍보조정실을 설치해, 신문과 방송에 매일 “지침”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보도 가(可)”부터, “보도 불가(不可)”까지, “사진을 실어라 마라”까지, 기사는 “몇 면에 몇 단으로”, “권장 제목”과 “불가 제목”에 이르기까지, 지침은 아주 세세했다. 아무리 문공부 장관이 생살여탈권을 가졌다 해도, 언론사들이 독재권력의 충견이 되어 문공부 지시사항대로 제작하고,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언론인 행세를 했던 전두환 시대를 우리는 수치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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