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전두환과 신군부의 ‘5·17 쿠데타’를 막지 못한 민주화세력과 국민들은 또다시 국가테러리즘의 폭압 아래 숨죽여야 했다. 사진은 80년 6월 5일 서울 삼청동 중앙교육원에서 열린 국가보위비상대책위 현판식에서 전두환(왼쪽)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과 박충훈(오른쪽) 총리서리가 악수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7)
‘10·26 거사’를 주도한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만 제거하면 유혈사태를 막고 한국 사회가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던 상황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5·17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었다. 박정희 시대가 길러낸 군부 파시스트들과, 그 집권 18년5개월10일 동안 파시즘에 길들여진 관료세력·보안사·중정·검찰·경찰 등 공안기관들, 그리고 제도언론의 사주와 경영진들이 순순히 기득권을 포기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1910년 일제 강점 이래 80년까지 70년간의 한국 현대사는 국가테러리즘에 의한 폭력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36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는 인종주의 또는 민족우월론을 동원해 한국 민중을 ‘저열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편견을 양산했다. 폭압적 경찰과 무력을 동원해 민족적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하고 기본 인권을 말살해 나갔다. 2차 세계대전 뒤 한반도의 해방 공간, ‘민족국가 형성기’에도 국가테러리즘이 계승된 것은 한민족의 비극을 더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 권력집단 역시 기본적 인권과 사회정의를 짓밟고 테러리즘을 주도했다. 이승만은 하필이면 일제가 사회주의 계열의 저항을 억압했던 파시즘 방식을 고스란히 답습했다. 분단체제에 놓여 있던 남한의 극우 논리는 전시 일본보다 더욱 극단적 형태를 띠었다. 당시 한국군 지휘부의 의식 밑바닥엔 일본식 국가주의, 즉 파시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전향제도, 사상범 보호관찰, 국가보안법 등 다양한 폭력적 기제들도 일제 식민통치에서 빌려온 것들이다. 그리하여 분단구조와 반공주의가 국가테러리즘을 앞세워 80년까지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압살해 왔던 것이다.
이에 대한 도전이 60년의 ‘4월 혁명’이고, ‘부마항쟁’ 직후 막을 내린 박정희 시대의 처절했던 민주화운동사였으며, 전두환의 쿠데타에 맞선 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이었다. 광주항쟁은 식민지 범죄에 대한 거부,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인권을 향한 한국 민중의 새로운 각성의 표현이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광주항쟁’은 ‘4월 혁명’과 ‘부마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1980년과 정의의 문제’, <1980년 서울>, 조광 고려대 교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하지만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군부의 국가폭력은 더한층 ‘폭압적 야만시대’로 치달렸다. 전두환의 ‘5·17’은 박정희의 ‘5·16’과 판박이 쿠데타였다. 전두환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가장 먼저 신문·방송에 대한 전면적 검열을 실시했다. 국회를 해산했고, ‘5·16’ 때의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본받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구성했다. 기성 정치인들을 부패세력으로 몰아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언론인들을 해고시켰으며, 주간지·월간지 등 정기간행물 172종을 강제 폐간시켰다. <기자협회보>, <창작과 비평>, <뿌리 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월간중앙> 등이 대표적이었다. 또 정치군인들을 관료사회와 금융·산업계에 ‘낙하’시켜 군사독재의 친위부대로 삼았다.
전두환은 박정희가 하지 못했던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김대중과 재야 민주화운동가·종교인·교수·문인·언론인·학생세력 일부까지 엮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37명을 구속기소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 각계 민주화운동 인사 9천여명을 체포 또는 수배했다.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민주노조를 철저히 파괴하고, ‘사회정화와 폭력배 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시민 6만여명을 영장 없이 검거해, 그 가운데 3200여명을 군법회의에 넘기고, 4만명 가까이를 4주간 군대에서 ‘삼청교육’을 받게 한 뒤 6주간 강제노역에 처했다. 불교계를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무·발호하는 비리지대”인 양 매도하고 80년 10월 중순부터 1주일간 군경을 풀어 전국의 모든 사찰을 수색했다. ‘10·27 법난’이라 불리는 불교계 탄압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송월주 스님이 신군부의 거듭된 종용에도 불구하고 ‘5·17 쿠데타’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월주 스님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총무원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전두환은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고 강제징집해간 대학생 450여명을 대상으로 ‘학원 프락치’를 만드는 비열한 ‘녹화사업’까지 벌였다. 이 가운데 정성희(연세대 81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김두황(고려대 80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최은순(동국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등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우리 국민은 군부 통제에 실패함으로써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지옥 같은 고통과 공포의 세월을 살게 되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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