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신군부의 ‘5·17 쿠데타’ 때 또다시 연행됐던 필자(성유보)는 위암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던 부친을 간병한 ‘알리바이’ 덕분에 곧 풀려났다. 이듬해 별세한 부친이 남긴 ‘큰 숲을 보라’는 말씀을 따라 필명을 ‘이룰태림’으로 지었다. 1949년 할머니(가운데) 회갑잔치 때 찍은 가족사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머니(왼쪽)와 아버지(오른쪽)의 모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5)
1979년 5월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동아투위는 수유리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 새 언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18일 새벽 1시쯤 동아투위 위원장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화여대생이라고 밝힌 그 여성은 “지금 군인들이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 대표들을 무차별로 연행해 갔으니 동아투위 여러분들도 피하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잡혀갈 우려가 있는” 사람들은 일단 도망치기로 했다. 우선 고 이병주 위원장과 이종욱(신동아부 출신) 총무가 ‘도망자 1·2호’로, 그다음으로는 나를 포함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던 10명이 지목되었다. 그런데 유독 고 홍종민 총무만은 ‘도바리’를 거부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나는 양심에 거리낄 일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며 버텼다. 결국 그는 5월18일 저녁 집으로 들어갔다가 잡혀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심장병을 얻었고, 88년 43살 한창나이에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다. 우리는 그때 끝까지 그를 설득해서 함께 도망치지 못한 회한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경험에 비춰, 독재시대에는 위험신호가 오면 무조건 ‘삼십육계 가운데 줄행랑이 위지상계’다. 조작된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신군부는 고 송건호 선생과 홍 총무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결부시키려고 엄청난 고문을 했다. 그 조작의 도표에는 동아투위·조선투위·기자협회도 들어 있었다.
나는 도바리 초기 김종철(현 동아투위 위원장)·정연주 위원과 함께 움직였다. 교도관 전병용이 서울 천호동에 살던 김문숙 선생 집에 피신시켜준 덕분이었다. 김 선생은 50년대 서울의 학생사회에서 이름을 떨친 주먹이었다. 그는 의협의 주먹이었기에 경찰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런데 멀쩡한 장정 3명이 하루 종일 집안에서만 맴도는 것을 수상히 여긴 이웃 누군가가 경찰에 밀고를 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경찰은 곧바로 덮치지 않고 간접신호를 보냈다. 다시 전 교도관의 도움으로 우리는 뿔뿔이 헤어졌는데, 나는 성동구치소 부근의 새 은신처로 옮겼다.
그러나 문제는 위암 수술을 받고 국립의료원에서 입원중인 아버님이었다. ‘5·17 쿠데타’ 일주일쯤 뒤 나는 살짝 병원으로 숨어들었다. 나를 본 아버님의 첫 말씀이 “너는 괜찮냐?”였다. “괜찮으니까 이렇게 왔지요” 하고 답했는데도 영 안심이 안 되는 눈치였다. 나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씩은 몰래 아버님 문병을 했다. 두 달 뒤 7월 아버님이 퇴원을 하게 되자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에라 모르겠다” 싶어 도곡동 우리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직후 반바지에 맨발 슬리퍼 차림으로 수박을 한 통 사서 돌아오던 나는 집 앞에서 기다리는 두 남자를 보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는 “양해를 해준다면 내일 아버님을 경산 고향집에 모셔다 드리고 모레 자진출두하겠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한 사람은 수긍하는 듯도 했으나 옆사람이 “뭐가 말이 많아? 그냥 갑시다” 하며 잡아끌었다. 그 순간 대문을 열고 나오던 아내가 곧 눈치를 채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양말과 구두라도 신고 가게 해달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나는 그렇게 남영동 분실로 끌려갔다. 그 무지막지했던 사나이는 보안사에서 파견 나온 요원이었다.
사실 내가 끌려간 혐의는 이른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한 것밖에는 없었다. 박세경·이돈명·홍성우·황인철·이돈희·나석호·이범열·강대헌·박인제·안명기·김동정·정춘용·조승형·김제형·조준희·이세중 등 변호사, 임재경·장윤환·정태기·안성열·김명걸·박종만·이종욱·윤호미와 나를 포함한 언론인, 종교계에서는 조남기·강문규·김상근·김용복 목사, 문인으로는 신경림·구중서·윤흥길·박태순·조태일, 출판계 최옥자 등이 같은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신군부는 선언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임재경과 이종욱을 구속시켰다.
닷새 만에 남영동에서 풀려난 나는 곧바로 아버님을 뵈러 경산으로 내려갔다. 그때 아버님은 “네가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네가 나쁜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숲’에는 호랑이도, 여우도, 늑대도, 토끼도 산다. 옳고 그름을 너무 날세우면 피곤해서 못 사느니라.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만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해라”라고 마치 유언처럼 당부하셨다. 아버님은 이듬해 돌아가셨다.
2000년대 들어 이메일 주소를 만들 때 나는 문득 아버님 말씀이 떠올라 주소를 태림(泰林)이라고 지었다. 2008년 큰 수술을 받고 되살아난 나는 이듬해 여름 임동원·채현국·임재경 선생과 함께 <한겨레>에서 주최한 시베리아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본 시베리아의 광활한 대지와 대자연, 큰 숲들은 어느덧 “섬나라 좀팽이”가 되어버린 내게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줬다. 2009년 말 희망래일 대표를 맡으면서 필명을 ‘이룰태림’으로 쓰기로 했다. 참고로 내 성씨인 ‘성’(成)을 한글로 풀면 ‘이룰’이 된다. 이제부터는 이룰태림을 아예 내 본명으로 삼을 생각이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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