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사라지자 민주화운동 진영은 군사정권 시대는 막을 내릴 것으로 낙관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 군사쿠데타’를 예견하지 못했다. 사진은 그해 12월12일 저녁 신군부 반란군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서울시내 곳곳의 교통을 차단하는 바람에 시민들이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3)
동아투위는 1970~80년대 113명의 위원 모두가 위원장이나 총무를 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언제든 잡혀가 옥살이를 하거나 수배자 신세가 되어도 좋다는 결기였다.
고 안종필 위원장과 고 홍종민 총무에 이어 장윤환 위원장 대리와 박종만 총무 대리, 그다음 윤활식 위원장 대리와 이기중 총무 대리가 <민권일지> 사건으로 연이어 구속되었음에도 동아투위는 79년 1월9일 다시 이병주(전 <한겨레> 이사·작고) 위원장 대리, 이종욱(신동아부 출신) 총무 대리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미 조민기·이의직 위원이 유명을 달리해 111명으로 줄어든 가운데 10명이 감옥에 간 비상상황에서도 이 위원장과 이 총무는 투위의 정상적 활동과 구속자의 재판 진행을 위한 법무팀 운영, 옥바라지 등으로 숨 돌릴 틈도 없었다.
그런 중에도 79년 3월9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동아투위를 위한 기도회’를 공동으로 열었고, 3월17일에는 돈암동 가톨릭상지회관에서 ‘3·17 해고’ 4돌 기념식도 했다. 이 기념식에서 이 위원장 대리는 “옥중으로 옮겨간 자유언론의 기수들을 뒷받침하고 그들에게 후고의 염려를 덜게 하는 일이야말로 뒤에 남은 우리들에게 맡겨진 임무”라고 다짐했고, 고 천관우 선생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아 조심하는 마음으로 견뎌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으며, 고 이돈명 변호사, 고 박현채 교수, 한완상 교수가 특강을 했다. 이어 6월에는 ‘카터 미국 대통령에 대한 공개질의서’를 발표하고 사무실에서 농성을 벌였으며, 9월에도 조선투위와 공동으로 ‘제도언론의 말기적 증상을 우려하며’라는 성명서를 내고, 와이에이치(YH)무역·도시산업선교회·가톨릭농민회 등의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 침묵하는 언론의 기능 마비를 비판했다.
그러나 79년 말부터 ‘하나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또다시 군사정권을 세우기 위한 물밑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아무도-김대중·김영삼의 정치권도, 학생운동 세력도, 동아투위를 비롯한 지식인그룹도-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신군부 집단은 ‘긴조 9호’ 해제로 유신 말기 양심수들을 풀어주는 한편, 자신들의 집권에 장애가 될 우려가 있는 인물들은 다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동아투위의 이부영·임채정 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부영 위원은 79년 11월13일 고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서 동아투위·조선투위·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수호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가 내외신 기자들을 초청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임채정 위원은 11월24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 공동 준비위원장을 맡았다고 해서 ‘포고령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것이다.
마침내 12월12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함으로써 야욕의 발톱을 드러냈다. 한 사회가 민주화하는 첫 단계는 군대를 문민정부 휘하로 끌어넣는 일이다. 유신독재가 성립한 것도 박정희 1인이 군을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 피살 뒤 군부의 동태를 거의 살피지 않았던 것은 패착 중의 패착이었다.
왜 이런 낙관 무드에 빠져들었을까? 민주화운동 세력은, 박정희가 ‘심복’ 김재규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목격한 정치군인들이 더이상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그대로 가면 제2, 제3의 부마사태가 일어날 상황인데, ‘다시 4·19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하는 박정희의 말을 듣고, 엄청난 유혈사태를 막고자 박 대통령의 목숨을 거두기로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므로 ‘또 어떤 군인이 있어 박정희의 전철을 밟으려 할까’ 하는 안이한 생각들을 한 것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김재규의 암살 거사는 군의 권력욕을 예방하지도 못했고, 국민들의 희생을 저지하지도 못했다. 다만 군·민 대결을 한동안 유예시켰을 뿐이었다.
부마항쟁의 추이에 대해서도 당시 정치군부와 민주화운동 세력은 정반대로 해석했다. 정치군인들은 “부산에 비상계엄령을, 마산에 위수령을 발동시키자 시위는 순식간에 사그라들더라. 역시 사회 혼란을 막는 최후의 힘은 군대가 갖고 있다”고 자신한 듯했다. 반대로 민주화 진영에서는 “만약 박정희가 피살되지 않았더라면 조만간 전국 곳곳에서 제2, 제3의 봉기가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것이니, 그런 상황에서 군부가 또 정치야욕을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부마항쟁의 계기가 된 79년 8월9일의 와이에이치 노동자 187명의 신민당사 진입, 그 이틀 뒤 전투경찰의 신민당사 난입, 뒤이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국회의 제명과 총재 권한 박탈 등은 일시에 몰아친 회오리바람 같았다. 그러자 민청학련 사건 이후 5년 남짓 동안 조용했던 부산과 마산에서 갑자기 학생·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민중들의 항거는 그러나 신기루처럼 하루 만에 사라져버렸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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