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성유보)가 두번째 수감됐던 1979년 여름,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전국의 교도소에는 유신 말기 ‘긴급조치 9호’가 양산한 정치범들로 넘쳐났다. 사진은 89년 말 독립공원으로 탈바꿈하고자 철거작업이 진행중인 서울구치소 전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71)
1979년 초 ‘동아투위 소식 78년 송년특집 사건’으로 윤활식 위원장 대리, 이기중 총무와 함께 두번째 구속되었을 때 다시 들어간 서대문 서울구치소에는 안종필 위원장, 장윤환 위원장 대리, 홍종민 총무, 안성열·박종만·김종철·정연주 위원이 이미 갇혀 있었다. 대학생 양심수만도 50명이 넘었고, 78년 수감된 김승균(전 <사상계> 편집장), 김병곤(민청학련 석방자), 통일당원 권혁충과 최형오, 통사당원 장재철, 이화여대생 박인혜·오현주·한경희, 시인 양성우, 박형규·문익환 목사, 성래운 교수 등도 볼 수 있었다. 내 뒤로도 고 조태일 작가,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김종완·조범원·송좌빈 선생과 김용훈 등 ‘긴급조치 9호’ 구속자들이 계속 들어왔다.
‘학생운동 연구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학생운동의 시대>, 이호룡·정근식 엮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을 보면, 77년 90명이던 구속 학생이 78년 230명, 79년에는 287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서대문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니 구치소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어느날 구치소 쪽은 하루 한번 20~30분 운동시간에 정치범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지 못하도록 운동 마당에 부챗살 모양으로 시멘트벽을 쌓아 올렸다. 우리는 겨우 하늘 한 귀퉁이만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이때까지 남아 있던 민청학련 사건의 김지하(재수감)·장영달(˝)·이현배·유인태·이강철·김효순 등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일제히 단식 투쟁을 벌였다. 우리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구치소에서 썩은 음식이 나올 때면 일반 재소자들을 선동해 구치소 전체를 들썩이게도 했다.
구치소 쪽은 이 모든 소동의 배후로 동아투위 위원 10명을 지목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결국 그해 6월 우리 10명을 성동구치소·영등포교도소·영등포구치소 세 군데로 나눠 보냈다. 나는 윤 위원장, 이 총무와 함께 영등포로 ‘유배’되었다.
서울구치소와는 달리 영등포로 옮겨가자 외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내 기억 속의 사회적 시간은 79년 5월31일로 멈춰 버렸다. 더구나 1심 재판 막바지에 조준웅 검사가 한 논고는 우리를 몹시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삼국지>에 ‘읍참마속’이라는 말이 있다. 명령을 어긴 마속을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다. 전체가 살기 위해서는 아무리 유능하고 사랑하는 부하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 세 사람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인재이기는 하나 처벌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구형한다. 윤·이 피고인에게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 성유보(필자) 피고인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
화가 났지만 내 딴에는 점잖게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응수했다. “검사는 우리들을 삼국지의 마속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박정희 정권이 제갈량이란 말인가? 자유언론 문제는 전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했다고 검찰은 말했다.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나 정권을 잡을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검사도 지금 당장 옷을 벗고 정치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이돈명·박세경·황인철·홍성우 변호사의 무료변론 덕분에 우리는 재판정에서 소신껏 말할 수 있었고 재판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 고마움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
그해 7월13일 1심 선고공판에서 윤 위원장과 이기중 총무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나는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받았다. 2심 재판 열흘쯤 뒤인 10월27일 오후 내가 전혀 모르는 한 재소자가 면회를 왔다가 내 방 앞을 지나치면서 손짓하며 불렀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는 탕탕하며 권총 쏘는 시늉을 하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가, 로마 황제가 패배한 검투사에게 죽음을 명할 때처럼 하듯 엄지를 내려뜨렸다. 수수께끼도 그런 수수께끼가 없었다.
총을 쏘았다. 엄지가 고개를 숙였다. 엄지란 누굴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엄지를 내밀 때는 일국의 대통령밖에 없지 않은가?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고? 어찌 그런 일이? 아무튼 박 대통령 신변에 탈이 난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교도관들도 아침부터 평상복 대신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앉아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도 10~20년 종신집권 할 듯 위세를 부리던 박 대통령이 비명횡사를 하다니!’ 당장은 곧 풀려날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동시에 삶이 참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등포구치소 쪽은 28일 낮에야 “박 대통령이 유고를 당했다”는 소식만 소내 방송으로 알렸다.
11월8일의 2심 재판은 곧바로 선고공판일이 되었다. 윤 위원장과 이 총무에게 징역 10월에 자격정지 1년·집행유예 2년을, 내게는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그날로 석방되었고 나만 구치소에 남았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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