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5월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79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해제될 때까지 수백명의 ‘대학생 양심수’를 낳았다. 사진은 95년 5월13일 선포 20돌을 맞아 ‘긴조 9호 세대’ 민주화운동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모습. 왼쪽부터 신형식 신인령 신언권 양길승 조희연 나병식 원혜영 이철 이우재 김부경 주대환 유종성 최순영 유기홍씨.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8)
1975년 이래 ‘긴급조치 9호’ 시대는 정보와 역사기록의 암흑기였다. 당사자인 나 역시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던, 그 시기 학생운동을 오늘날 일부나마 재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언론인이자 저술가인 신동호씨 덕이다. 그는 2000년 초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긴조 9호’ 관련 대학생 300명 이상을 인터뷰해 70년대 후반 학생운동사를 복원해냈다.(<70년대 캠퍼스>, 환경재단 도요새, 2007)
긴조 9호에도 불구하고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은 75년 가을 곧바로 재개되었다. 서울대에서 학도호국단 사열식 때 윤천주 총장이 9번이나 “받들어총”을 명했으나 학생들은 끝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침묵시위’를 했다. 77년 4월혁명 17돌 때 연세대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은 경찰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김철기·김성만·강성구·우원식 등은 이날 학생들에게 종이 한장씩을 나눠주었다. 그러자 사복형사들이 달려들어 이들을 연행했다. 그런데 아뿔싸, 그들이 나눠준 것이 성명서가 아니라 하얀 백지였다. 그해 가을 서울대 사회대에서는 학생들이 학생회장 후보로 김부겸을 내정하고, 윤 총장을 면담해 학도호국단 간부 임명제를 간선제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그런데 대학 쪽은 이들 면담 학생들을 징계했다.
학생 시위의 물꼬가 다시 터진 것은 77년 10월이었다. 10월13일 연세대에서 노영민·김거성, 단둘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점심시간 노영민은 대강당 3층에서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해제하라”며 유인물을 뿌렸고, 김거성은 신학대 강당에서 채플이 끝나자 유인물을 뿌린 뒤 학생들과 시위를 벌였다. 12일 뒤인 10월25일, 강성구·이상훈·공유상·우원식·박성훈·장신환 등이 주도한 시위에는 4000여명의 학생이 교내 백양로를 가득 메웠다. 강성구는 대강당 4층 박물관에 비밀리에 잠입해 창문을 깨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상훈은 대강당 앞에서 유인물을 뿌렸으며, 우원식은 교내 방송실로 들어가 ‘진군가’를 틀었고, 공유상은 시위대를 이끌고 이화여대를 거쳐 신촌 네거리까지 진출해 서강대생들과 함께 시위를 했다. 경찰은 이들과 이대수·오성광 등 7명을 배후로 지목해 구속했다.
서울대에서는 11월11일 김경택·권형택·연성만·문성훈·양기운·장기영 등이 ‘민주구국투쟁 선언문’을 발표하고 도서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3000명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7시간이나 걸렸다. 경찰은 도망간 권형택을 뺀 주동자 전원과 김부겸·이철국·이창호 등을 구속했고, 28명은 제적당했다.
78년 5월1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일이었다. 서울대의 부윤경·서동만·김철수 등이 5월8일 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 1500명은 교문을 뚫고 나와 봉천동과 신림동까지 진출했다. 이어 6월18일에는 서울대의 김수천·이우재·김종복·이필렬·성욱 등이 5000여명의 학생들과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서울대 사상 최대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6월26일 세종로 네거리에서 범시민대회를 연다”고 예고했다. 그 덕분에 광화문 시위는 4000명이 모일 정도로 치열했고, 밤 10시 반까지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충돌을 빚었다. 이날 19명이 구속되었는데, 고려대에서는 이승환·강춘구·송광의·허현회·임경민·김동광·이정구 등 이념서클 회원 7명이 포함됐다.
‘광화문 데모’로 수배자가 된 이우재·성욱·김종복 등은 김준묵의 도움으로 ‘도바리’(도망)를 치면서도 주대환·양민호·조성을과 접선해 가을 시위를 모의했다. 이들은 9월13일 서울대 시위 현장에서 “유신 6년을 맞는 78년 10월17일 오후 6시 광화문광장에서 범시민 학생궐기대회를 한다”고 선포했다. 이날 시위대 2000여명 가운데 600여명은 장승배기와 노량진으로 진출했다. 이날도 조성을과 김종복만 잡히고 나머지 4명은 도피에 성공했다.
하지만 “유신 6돌을 유신의 제삿날로 삼겠다”던 10월17일의 광화문 시위는 미수에 그쳤다. 대학간 연대 시위를 기획했던 서울대의 ‘시위조직팀’(황인성·유종성·류인열·옥광섭), ‘현장출동팀’(이우재·성욱·양민호), ‘유인물팀’(조희연·김준묵·권호영) 등과 ‘6개 대학 연합시위팀’의 장준영(성균관대)·정경연(고려대)·김성남(˝)·백삼철(서울대)·주대환(˝)·정태윤(˝) 등은 검거되었고, 김종수(서울대)·강구웅(˝)·권명자(서울여대·권민성으로 개명) 등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10·17 거사’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흥국(서울대)의 유인물팀(20~30명으로 추정)은 대학가와 서울시내에 유신독재 반대 유인물을 뿌리다 잡혀갔다.
서울대에서는 11월13일, 78년을 마무리하는 또 한 차례 시위가 있었다. 김용흠·이필렬·천윤배 등이 주도한 이날 시위는 300~400명밖에 호응하지 않아 30분 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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