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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유신 폭압 피해 학생운동 현장 속으로 / 이룰태림

등록 2014-04-06 19:05수정 2018-05-10 13:36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5년 4월8일 긴급조치 7호에 이어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통해 학생운동을 집중탄압했다. 사진은 오로지 대학가 시위를 막고자 발동한 ‘긴조 7호’에 따라 4월8일 오후 5시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교문 앞에 계엄군이 무장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5년 4월8일 긴급조치 7호에 이어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통해 학생운동을 집중탄압했다. 사진은 오로지 대학가 시위를 막고자 발동한 ‘긴조 7호’에 따라 4월8일 오후 5시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교문 앞에 계엄군이 무장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7)
1975년 봄은 유신 폭압의 절정기였다.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의 언론인 대량 해직과 ‘인혁당 사건’ 전격 사형 등에 이어 그해 5월13일 발동된 ‘긴급조치 9호’는 일시적으로 민주화운동 전반을 질식시켰다. 특히 학생운동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학생운동은 2년간의 침체기를 겪은 뒤 복원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를 통해 새로이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의 두 중요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4·19의 주역이라 할 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5·16 군사쿠데타의 주역인 군부 엘리트였다. 민주화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이 두 그룹은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군부 엘리트들은 빈곤 탈피의 의제를 들고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학생들은 민주화를 대표했다.”(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해방공간에서 미국은 남한에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자유·인권·민주주의라는 근대사상을 의식화하고 법제화하고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반공 냉전주의를 법제화하고 그를 강제할 공안기구를 창설하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친일 관료, 친일 경찰, 친일 군인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후 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세계에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남한의 자유주의 진영 이탈과 동서냉전 속 중립화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태어났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내걸었을 때 “잘살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박정희표’ 근대화는 효율성과 군대식 목표 달성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학생세력 역시 근대화는 적극 찬성했으나 박정희표 산업화, 즉 외채의존 자본 조달, 재벌육성 자본 축적,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노동 약탈적 경제개발에는 반대했다.

학생운동은 ‘민주화와 함께하는 산업화’를 요구했다. 민족자본과 중소기업이 병존하고, 노동세력과 산업자본이 대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노동자·농민·자영업자들이 인간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근대화를 지향했다. 다시 말해 일제가 식민지 백성을 강제동원한 만주 개발 식의 산업화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권자로서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산업화와 민주화가 두 날개를 펴는 근대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운동이 이처럼 정치·국제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사회 각 분야의 과거와 현재를 파악하고 시대적 과제들에 대해 올바른 정신을 펼치기 위해서는 학회나 서클(동아리) 활동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학생운동을 침묵시키고자 했고, 학생 서클 활동을 끊임없이 방해했다. ‘긴조 9호’ 때 집중 탄압을 받은 것도 바로 학생 동아리였다. 76년 들어 일부는 복원되었지만 유신 말기까지 동아리들은 점점 소수화·정예화·지하화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 법대에서는 농촌법학회와 경제법학회가 명맥을 유지했고, 서울대 상대에서 한국사회연구회가 사회과학회로, 이론경제학회가 경제철학회로, 후진국경제학회가 경제문제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등록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역사철학회·흥사단 아카데미·사회과학회·사회철학회·현대사회연구회 등 신생 이념 서클들이 등장했다. ‘긴조 9호’로 한맥회와 한국민족사상연구회가 해체당한 고려대에서는 기왕의 도산연구회에다 75년 청년문제연구회와 민족이념연구회가 생겨났고, 78년에는 법률행정위원회·사회과학연구회·한국농어촌문제연구회 등이 창립되었다. 한국문제연구회가 해산됐던 연세대에서는 기독교계 학교답게 기독학생회가 이념 서클의 공백을 메웠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박석운(서울대 법학과 73학번, 현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민언련 공동대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71년 위수령, 72년 10·2 시위,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운동의 조직과 역량이 싹쓸이되었다. 나도 민청학련 때 2학년으로 유인물 심부름을 하다가 구속되었다. 이제 운동은 중장기 투쟁으로 가야 했다. 후배를 길러내는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절실했다. 시위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계속하되, 고학년에서 나서고 소수가 모든 책임을 지는 방식이어야 했다. 물론 학생운동만으로는 민주화 실현에 한계가 있는 만큼 노동자·농민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위해 기층 대중으로 이전해 나가는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했다.”(신동호, ‘197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과 방식’, <학생운동의 시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이념 서클들은 활동가 양성을 위한 교육과 훈련의 방법으로 세미나·수련회·농촌봉사활동 등에 집중했다. 그 결과 유신 말기에 이르러 이른바 ‘현장 진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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